좋은만남교회

2020.03.08 14:08

2020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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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생명'의 달]

긴 겨울을 마치고 만물에 생명력이 감도는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새싹들이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와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려야 할 계절에 코로나19로 인하여 여전히 겨울을 지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충만한 생명력이 우리와 자연, 우주에 함께하시기를 바라며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기도합시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사순절 제2주일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기다리는 절기를 통해 고난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신비와 감동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우려하여 주일 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지 않으니 가정에서 경건하게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정은 단체톡방을 통해 공유하고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3. 교회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개인적인 건강상태나 특별히 기도할 일이 있으신 분은 전화나 문자, 카카오톡 등으로 담임목사에게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4. 주보와 함께 사순절 묵상집을 가정으로 우편발송해 드렸습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매일묵상을 게재하지 않으니 묵상집으로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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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코로나19가 교회에 주는 고민과 요구

 

코로나19 감염 확산 증가세가 진정될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친 듯이 올라가던 확진자 수가 여전히 500명대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신천지 교인들에 대한 감염 검사가 꽤 많이 진행되었으니 확산세는 꺾이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물론 여전히 심각한 사태이고 다 잡았다 안심했을 때 다시 확산될 수 있으니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는 없겠습니다.

코로나19는 교회에도 변화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주일성수가 이번 사태로 많은 교회에서 중단되었습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교회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저도 생각이 많아집니다. 코로나 사태로 발생한 변화의 요구이지만 어쩌면 진작부터 고민했어야 할 것들이 이번에 터져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랫동안 해왔던 생각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몇 년 뒤에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집니다.

한 인간으로서 예배를 안 드리면 편할 줄 알았는데 지난 주일을 지내고 보니 결코 그렇지 않더군요. 내색은 안 했지만 뭔가 많이 불편하고 걱정됐습니다. 그게 뭘까 궁금했는데 인터넷에서 어떤 목사님이 올리신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어느 목회적 고심"이라는 글을 보면서 공감이 됐습니다. '예배당에 모이지 않기에 헌금이 줄어 교회 운영과 생계가 고민되었다'로 시작하는 글은 모두 스무 줄로 이어졌습니다. 이중에 몇 개는 저도 공감하게 됩니다.

"단톡방 소식란에 교회헌금계좌를 알려주면 나보고 속물이라고 할까봐 고민되었다 / 앞으로 계속 이렇게 예배 드리자고 할까봐 고민되었다 / 교인도 많지 않은데 굳이 교회 건물이 필요할까 고민되었다 / 교인과 일체 접촉을 하지 않으니 편하기는 한데 이래도 되나 고민되었다 / 기존에 무르익었던 성경교육과 교회 공동체 단합이 와해 될까봐 고민되었다 / 미래에 사스, 메르스, 코로나19보다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오면 어떡하지 고민하였다 / 코로나 사태 초기부터 주중 모임을 안 하기 시작하여 확산된 후 주일 예배를 안 드리는 것에 대해 혹시 ‘목사가 설교 준비하기 싫어서 그러나’라고 하는 분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봐 고민하였다."

저는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매주 경험하고 기념하며 축하하고 동참하는 거룩한 예전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성수주일)은 중요합니다. 또 일상에서는 듣지 못하고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거룩한 가르침, 진리에 대한 말씀을 듣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옳은 방향을 잡고 그릇된 풍조와 유행에 맞서기 위한 중요한 무기이니 주일예배는 포기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지 않고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면, 인터넷이나 유선방송 등을 통해 거룩한 말씀을 듣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예배가 말씀만을 듣기 위한 시공간이 아니라 성도들의 거룩한 입맞춤, 교제 때문에도 매우 중요하고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동지들이 한 주간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염려하기도 하고 기쁜 일에 축하해주면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으로 예배를 보는(!) 것은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대형교회를 바람직하지 않게 보는 것도 이런 관계와 연대성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얼굴 대 얼굴로 대면하던 시대는 지났고 과학의 발달이 이런 관계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양지와 음지가 있겠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저의 생각도 바뀌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미래가 교회를 통해 먹고 사는(급여를 받는) 목사만의 고민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온 신앙공동체이자 삶과 이념을 나눈 동지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교회의 변화에 건강한 대안을 만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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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8-10.jpg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절실합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서민들의 불편과 피해가 막심합니다. 식당을 찾는 손님도 크게 줄었고 각종 서비스업도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다. 유치원은 개학이 연기되어 3주나 빠지게 되었지만 한달치 원비를 다 내라고 요구하거나 교사들의 급여를 삭감하려고 합니다. 결혼식, 돌잔치 등을 위해 행사장을 예약하였던 이들도 막대한 계약해지 비용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업체들은 코로나19가 천재지변이 아니기 때문에 무료 해약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해외여행을 계획했던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위약금을 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또 외국의 한국 비행기 운항 중단으로 항공편이 취소되는 바람에 한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거나 항공사가 일방적으로 출발공항을 변경하여 항공기 탑승을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가 일반 서민이나 기업, 상업과 서비스 종사자들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황이기에 그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서민들에게 일방적 손해를 강요하는 일은 부당합니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도 도움의 손길을 나누고 배려하는 자세가 절실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코로나19로 자영업자들과 서민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임대료를 깎아주거나 일부러 식당을 찾아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피해를 일방적으로 떠넘기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서로를 배려하여 극복하려는 마음을 갖고 이 위기를 견디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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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당신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영화 10선

 

앞의 두 단락을 통하여 필자가 추천하고자 하는 영화의 기준과 맥락이 어느 정도 설명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협소한 경험과 관점이 반영된 필자의 ‘인생영화’들이지만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꼭 봐야 할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경험하게 되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01.jpg1) 말하는 건축가 (Talking Architect)  / 정재은 감독, 2011년, 한국

“진정한 건축은 눈에 보여지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하는 건축가>는 존재의 이유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이 가득한 영화입니다. 

 

02.jpg2) 원더풀 라이프 (Wonderful Life)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1998년, 일본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축복의 통로는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복의 근원입니다. <원더풀 라이프>는 내 주변의 모든 것, 나아가 나 자신의 존재마저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영화입니다.     

 

03.jpg3)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 / 퍼시 에들론 감독, 1987년, 서독

“모든 게 마술 같아서 슬플 일은 없지, 오늘을 사는 거예요!"

편견과 차별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은 서로의 손을 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그다드 카페>는 황량한 사막에 자리 잡은 허름한 카페가 희망의 오아시스로 변하는 마법 같은 기적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영화입니다.

 

04.jpg4) 쉐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 /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 2017, 미국 

“내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눈빛이예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

혐오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 과연 우린 어떤 모양으로 사랑할수 있을까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모양’을 우리에게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05.jpg5) 5일의 마중 (Coming Home) / 장예모 감독, 2014, 중국

“돌아올 거야 그가 돌아올꺼야”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5일의 마중>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의 애절함과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위대한 사랑이 담긴 영화입니다. 

 

06.jpg6)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Faces Places) / 아녜스 바르다, JR 감독, 2017, 프랑스

"당신의 눈과 발이 이야기를 하네요. 이 기차는 당신이 못 가는 많은 곳을 가겠죠."

생동감있는 당신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가장 예술적으로 전달해주는 영화입니다. 

 

07.jpg7)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The Friend's Home?) / 압바스 카아로스타미 감독, 1987, 이란

"엄마. 실수로 네마자데의 공책을 가져왔어요."

순수함이야 말로 신실한 신앙의 원동력이 아닐까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 소년의 순수한 발걸음과 동행하는 영화입니다. 

 

08.jpg8) 엔젤스 셰어: 천사들을 위한 위스키 (The Angels' Share) / 켄로치, 2012, 영국

"오크통에 보관된 위스키는 해마다 2%가 증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데 그걸 ‘앤젤스 셰어’ 즉 ‘천사의 몫’이라 불러요"

정의로운 사회는 사랑과 유머, 존중이 가득한 공동체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엔젤스 셰어: 천사들을 위한 위스키>는 소유와 나눔의 실체와 가치를 가장 정확한 유머로 풀어가는 영화입니다. 

 

09.jpg9)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 / 리들리 스콧 감독, 2005, 미국

"예루살렘은 당신에게 어떤 곳이오? 아무 것도 아니요. 또한 모든 것이기도 하지요."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의 흑역사입니다. 과거의 우리를 알아야 오늘의 우리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킹덤 오브 헤븐>은 한 때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여 사람들을 학살했던 기독교의 일그러진 자화상과 같은 영화입니다. 

 

10.jpg10) 바울 (Paul, Apostle Of Christ) / 앤드류 하얏트, 2018, 미국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다네"

 

감옥에서 바울은 불의와 공포에 떨고 있는 누가에게 사랑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는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성서 속에 갇혀있는 바울과 누가, 아굴라와 브르스길라가 얼마나 매력적이며 놀라운 사람들인지를 증언하는 영화입니다.

이 글은 <기독교세계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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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그 믿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곧 참된 상相을 내리니 그 사람이 가장 드문 공덕을 이룬 것은 마땅히 알겠습니다만, 세존이시여, 그 참된 상이라는 것이 곧 상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이름(名)인 참된 상을 설하셨습니다.

 

世尊이시여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여 信心淸淨이면 卽生實相하리니 當知是人이 成就第一希有功德이오나 世尊이시여 是實相者는 卽是非相이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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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마음(信心)이 깨끗하고 맑다! 아무 꿍꿍이속 없이, 무슨 티끌 같은 욕심도 없이, 기대하는 마음도 없이 그냥 믿는다.

 

믿는다는 말은 상대에게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긴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곧이듣고 그대로 응應하는 것이다. 나를 상대에게 흡수 통일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의 ‘나’는 없다.

경을 믿어서 마음이 깨끗해진 사람은 그의 삶이 곧 경의 실현이다. 바울로의 고백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갈라디아서 2:20)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모습이 참된 (사람의) 모습(實相)이다.

 

그러나 그 참모습을 어디에 별개로 존재하는 한 모습으로 여긴다면 안 된다.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참모습은 모습이 아니다(非相). 물결에는 모양이 있고 크기도 있지만 물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 아무개’한테는 무게도 있고 키도 있고 색깔도 있지만(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 한테는 그런 것이 없다. 물결이 물이듯이 이 아무개는 사람이다. 이 아무개가 ‘사람’한테 자신을 흡수 통일시켜 더 이상 이 아무개로 행세하지 않고 사람으로 행세한다면, 그에게서 참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참사람의 모습도 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물건도 어디 따로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실상實相은 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실상이라는 것이 곧 상이 아님을 이르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큰 허공 같아서 한 가지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 참으로 실상을 깨달았다면 실상에 집착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건너 언덕 또한 여의고자 한다’는 부대사傅大士 말씀대로, 다만 실상實相이라고 짐짓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일 뿐 그것을 얻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顔丙)

 

천당 가려고, 사람 되려고, 깨끗해지려고... 예수 믿고 하느님 믿고 성경 믿고 부처님 믿는 것은 아직 멀었다. 그런 마음(~하려는, 되려는)이 모두 없어져야 비로소 믿는 마음(信心)이기 때문이다. 맑고 깨끗하지 않은 마음은 믿는 마음이 아니다.

 

사람인 이 아무개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거기 무슨 목적이, 의도가 따로 섞일 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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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빌 켈리>라는 분이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켈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고, 또 기도도 하였다. 기도가 끝났을 때 부인이 말했다. “여보, 당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머지않아 죽을 터인데요!”(We are all terminal!)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켈리씨의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 “그렇군.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구먼. 그렇다면 멍하니 앉아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무언가 좋은 일을 합시다.” 

그래서 두 부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의논을 하였고, 동네, 직장, 교회 등,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파티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모임은 암 파티(Cancer Party)입니다. 우리 부부는 MTC란 단체를 오늘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MTC란 “Make Today Count”(오늘부터 날짜를 헤아리면서 보람 있게 사는 것)의 약자입니다. 이렇게 하여 암환자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MTC 모임은 오늘까지 미국 전역에 조직이 되어 암환자에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보여주고 있다.

 

영어에 “에서 신드룸(Easu 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쌍둥이 형인 에서는 배가 고파서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습니다.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만 눈이 어두워 사는 사람을 가리켜 에서와 같다는 면에서 <에서 신드룸>이라고 합니다. 씨앗은 뿌리지 않고 열매만을 거두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면 좋아지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열매를 위하여 그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열매는 씨앗을 뿌린 자에게 주어지는 법입니다. 희망은 품으면 희망입니다.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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