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생명'의 달]
긴 겨울을 마치고 만물에 생명력이 감도는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새싹들이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와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려야 할 계절에 코로나19로 인하여 여전히 겨울을 지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충만한 생명력이 우리와 자연, 우주에 함께하시기를 바라며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기도합시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사순절 제1주일 및 3.1절 기념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기다리는 절기를 통해 고난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신비와 감동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우려하여 교인 투표를 거쳐 이번주일 예배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여 였으니 가정에서 경건하게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주도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 일정은 단체톡방을 통해 공유하고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3. 교회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개인적인 건강상태나 특별히 기도할 일이 있으신 분은 전화나 문자, 카카오톡 등으로 담임목사에게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4. 주보와 함께 사순절 묵상집을 가정으로 우편발송해 드리겠습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매일묵상을 게재하지 않으니 묵상집으로 해주십시오.
"목회서신"
대형교회에서 설교하는 꿈
며칠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이 얼마나 생생했던지 뒤척이다 못해 식은땀까지 흘린 것 같습니다. 어쩐 일인지 제가 몇 천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하긴 이것만 봐도 개꿈이긴 합니다) 부임한 첫 주일에 강단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평소 제가 하던 개혁적 내용의 설교였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강조한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고 내려온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제 설교가 교인들 마음에 안 들었던 것입니다. 교인들의 따가운 시선이 꿈에서도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 설교는 그들이 듣고 싶은 설교, 즉 복 많이 받고 이렇게 저렇게 믿어야 한다는 명확한 행동지침을 주는 설교가 아니라 이러저러한데 당신들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냐는 질문으로 끝나고 듣는 사람들의 결단을 강조하는 설교였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이걸로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드디어 다음주일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스타일의 설교, 제가 믿고 있는 바를 설교하지 않고 그들이 듣기를 원하고 그들 귀에 달콤한 감기는 설교를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마음은 착찹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이자 불편한 결단이었지만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으로 올라가면서 꿈은 끝났습니다.
이 꿈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전할 수 있을까 자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필연적으로 사람들 귀에는 쓰고 매울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삶의 무게 앞에서는 나약해지고 변덕스러워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힘들게 매일을 내적 투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에는 매운 말씀보다는 달콤한 말씀에 더 마음이 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웅변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야 좋은 웅변일 텐데 설교는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점쟁이도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복채를 받지만 저주의 말을 한다면 돈 대신 욕설을 듣겠지요. 예언자들의 선포는 십중팔구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였고 결국 미움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정말 나의 설교가 예언자들의 선포만큼이나 값어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비록 귀에는 따갑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양약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설교의 가치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목사에게 설교는 스트레스 그 자체입니다. 저처럼 일주일에 한 번이나 겨우 설교하는 목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잔치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선포가 되도록 귀를 열고 마음으로 받는 교인들로 인하여 목사의 설교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고 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이모저모"
이번주일 예배를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주일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천주교는 27일부터 16개 교구 전체가 미사를 중단한다는데 교구 창설 이래 19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모든 법회를 중단하기로 했고 개신교 역시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대형교회들이 예배 중단을 발표하였습니다. 우리교회도 단체톡방에서 투표를 실시하여 일단 이번 주일은 예배를 드리지 않기로 하였고 설교를 맡은 이관택 목사님이 영상으로 촬영하여 온라인에서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상황이 악화되는데 우리교회가 일찍 예배 중단 결정을 내린 것은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교우들에게도 이해와 협조를 구합니다.
참고로 코로나19로 인하여 이관택 목사님 부부의 선교사 파송 예배와 파송 일정도 당초 4월이었던 것이 5월말이나 6월초로 연기되었고 그나마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라오스 행 비행기편도 다 막혔고요. 이 목사님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어려움 당하는 모든 이웃과 인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1일 파업에 70명 해고, 롯데칠성을 규탄한다.
롯데칠성 하청노동자들 70여 명이 삭감된 성과급 회복 및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가 하루 만에 무더기로 직장을 잃고 사측에 면담을 요구하며 롯데칠성 대전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신영LS는 롯데칠성과 지게차 업무 용역 계약을 맺고, 롯데칠성 공장에서 일할 70여 명의 지게차 노동자들을 2018년 최저임금 인상률의 절반 수준으로 고용하고 있었는데 최저임금 인상을 이유로 정기상여금 300%씩 삭감하였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상여금 회복, 성과급 차별 철폐,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하루 파업을 벌였으나, 신영LS는 계약 해지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였으며 지게차 직원들의 공장 출입을 금지한다는 공문을 공장 문마다 부착하였고 같은 날 저녁 알바몬과 아웃소싱 업체를 통해 인력채용 공고를 냈습니다. 노동자들은 "정규직 직원들이 연말 성과급으로 기본급의 130%(최저 226만 원 이상) 받을 때, 신영LS 직원들은 11년간 20만 원만 지급받았다”며 “지게차 하청노동자들은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한 달에 100시간 가까이 연장근무를 하고, 명절이나 국경일에도 일했다. 심지어 (사측은) 점심시간에도 업무를 중단하지 말라고 닥달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 민중의 소리)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한국의 경제의 눈부신 발전 뒤에는 노동자들의 피아 땀,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은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이익 극대화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해고당한 롯데칠성 지게차 노동자들을 구하시고 정의를 세워 주십시오.
* 무엇을 볼 것인가? VS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봐야 할 인생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다소 염려되는 지점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문장의 맨 앞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4세기 어거스틴이 주창했던 두 개의 도성 개념 이후로 세계를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으로 이분화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성이 지배적이었는데, 이것이 유독 ‘문화현상’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낮은 울타리를 비롯한 비교적 진보적인 기독교 문화운동에서조차 ‘뉴에이지’나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를 동원하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문화’와 ‘세상의 문화’를 나누고자 했던 것은 바로 1600년 전의 어거스틴 신학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염려되는 것은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별하는(롬12:2) 과정이 자칫 ‘그리스도인은 무슨 영화(What)를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문제로 귀결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이 ‘봐야하는 영화’와 ‘봐서는 안 되는 영화’가 규정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객관식 문제풀이와 같은 선택의 태도는 그 동안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더욱 협소하고 배타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바라볼 때는 ‘무엇을 선택할지’(What)보다 ‘어떻게 볼지'(How)가 더욱 중요하다. 필자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청파교회의 표어를 좋아하는데,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과연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영화를 보는 것 또한 예외일순 없다. 모든 영화를 향해 당신의 마음을 열어놓기,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이 두 가지만 기억한다면 세상의 어떤 영화도 당신의 ’인생영화‘가 될 수 있다.
* 그리스도인 73명의 ‘인생영화’를 만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봐야 할 인생영화’라는 주제의 무게가 너무 컸던 탓일까. 필자의 협소한 경험과 관점의 한계 때문에 영화 선정에 있어서 다소 망설여졌다. 또한 궁금증도 생겨났다. 과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작품을 자신의 ‘인생영화’로 꼽고 있을까? 어쩌면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영화들을 마음에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필자를 설레게 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인들을 중심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해 보았다. 질문은 주제와 같았고, 1인당 1-5개까지 각자의 인생영화를 자유롭게 선정해서, 짧은 선정의 변과 함께 응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지난 일주일간 총 73명이 설문에 참여하였고, 그 결과 185편의 인생영화가 추천되었다.
설문을 진행하면서 느꼈던 것은 세계에서 영화를 2번째로 많이 보는 나라*답게 많은 분들이 수준 높은 답변을 보내주셨는데,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올해 한국영화가 아카데미 4관왕의 성과를 이룬 것은 이러한 열정과 애정이 그 밑바탕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저마다 나름의 기준과 관점으로 영화평론가에 준하는 선정의 변과 함께 다양한 작품을 인생영화로 꼽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제목조차 들어보지 못한 단편 영화부터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다만 결과를 살펴보니 우려했던 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이라는 전제가 참여자들의 생각을 다소 제한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봐야 할 영화 = 기독교 소재의 영화’라는 인식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교회 공동체 밖에서 예수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그리스도인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감동이 더욱 진한 것처럼, 비록 기독교 소재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의 가치를 듬뿍 담은 영화들이 더 많이 선정되기를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이 지면을 빌어 설문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한정된 지면 때문에 설문의 내용을 자세히 나누지 못하는 점이 못내 아쉽다.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그때에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는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쭙기를,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처럼 매우 깊은 경전을 설해 주시오니 제가 일찍이 얻은 바 혜안으로는 그와 같은 경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하고 深解義趣하여 涕淚悲泣하며 而白佛言하기를 希有로다, 世尊이시여. 佛設如是甚經典하시오니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는 未曾得聞如是之經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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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세계는 무한히 넓다. 그런데 그 ‘넓이’에 미치는 길은 옆으로(橫)가 아니라 아래·위(從)에 있다. 물결처럼 옆으로 밀려서 가장자리 끝까지 나아가는 게 아니라 깊이 들어가거나 높이 올라감으로써 ‘넓이’의 끝에 이르는 것이다.
성경을 읽든 불경을 읽든, 많이 읽는 것보다 깊이 읽는 것을 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진리를 깨달아 가는 길은 깊을수록 넓어진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남’을 받아들이는 푼이 넓지 못하다면, 열심히 굴을 파기는 했으나 중심을 향해 파지 않고 지평地平을 따라서 팠기 때문이다. 그런 굴은 두더지 굴이지 진리를 캐는 굴이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중심에 있다. 중심을 향하는 길은 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다른 길이 없다.
깊이 들어갈수록 ‘남’을 받아들이는 품이 넓어진다는 얘기는 그만큼 ‘나’가 무너지면서 ‘남’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나와 너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것이 없었음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드디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는, 그 뜻을 깊이 깨닫는다(深解義趣). 그 결과 슬픈 눈물이 흐른다. 그의 머리(知)가 아니라 가슴(感)이 법에 공명共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제가 일찍이 얻은 바 혜안으로는 그와 같은 경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 고백은, 부처님이 다른 종류의 경을 들려주셨다는 뜻이라기보다, 수보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났음을 고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공무상眞空無相의 법이야 어디 간들 달라지겠는가? 다만 그것을 깨닫는 사람의 눈과 귀에 변화가 있을 따름이다.
가정 생활도 원만하고 학생들을 성실하게 가르치는 믿음이 좋은 유명 대학 교수가 주일에 오병이어의 설교를 들었다. “어린 소년의 오병이어가 오천 명의 양식이 된 것처럼 오천 명을 먹이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라는 설교였다.
설교를 듣던 교수는 한 번 사는 인생,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그 자리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장인 장모님까지 함께 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심정을 설명하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천 명이 먹어야 할 것은 혼자 먹고서도 부족하다 여기는 사람이 있고, 혼자의 인생이지만 오천 명을 먹이는 인생이 있습니다. 저는 한 번의 인생을 살면서 오천 명을 먹이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중국 연변에 과기대가 있는데, 그곳에 가서 선교사로 일을 하면서 남을 섬기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크게 낙담하여 울었다. 그 바람에 어린 자녀들도 덩달아 울었다. 그 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장인이 사위에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게.”
안 쪽으로 내 자신 만을 바라보면 나 하나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시들어가는 인생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밖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보라 하시는 것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안에서 발견한 나를 밖으로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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