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4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6주일입니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이 땅위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코로나19 감염확산으로 인하여 주일 오전 예배를 비대면 온라인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은 화상회의 어플리케이션 줌을 통해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드립니다.
3. 민족 명절 추석을 앞둔 다음주일 예배는 온라인 화상예배와 병행하여 가능하신 분들의 예배당 현장 참여 예배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참여 인원은 10명으로 제한하고 공동식사는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 점 양해하시고 참석을 원하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4. 교우와 가정의 평화와 건강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 다음주일(9월 27일 . 왕국절 제5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이관택 목사 / 기도 : 안주영 성도
봉헌위원 : 오호숙 권사 / 성찬보좌 : 윤성일 집사 / 안내 : 임정희 집사

최근 미국에서는 밥 우드워드라는 기자가 쓴 '격노'라는 책이 논란입니다. 이 책 '격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폭로성 일화를 주로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밥 우드워드는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사임시켰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특종 기자로 워싱턴포스트의 부편집장으로 언론가의 저명한 인물입니다. 이 책이 한반도에 중요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 책에 따르면 2017년 미국이 북한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핵무기 80개를 사용할 것을 검토했다고 합니다. 매티스 당시 국방장관은 북한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작전계획 5027'을 검토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는 수백만 명을 소각하게 될 거야."라고 고뇌했다고 합니다. 만약 작전이 실행됐다면 한순간에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죽고 한반도가 영구적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계획으로 인하여 북한의 핵무장 의지는 더욱 강고해질 것입니다. 굳건한 한미동맹의 실체가 한반도를 언제라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국제적인 다양성을 옹호하지 않고 자국의 패권을 위하여 한국을 전략적 자산 같이 여기는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잘못된 판단으로 한반도의 8천만 명이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을 바로 잡고 평화를 이루어 주십시오.

보다 넓은 신학적 지평이 필요합니다.
한동안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종교계와 보수계의 집회로 인하여 확진자 수가 급증하였습니다. 지금은 100명대를 유지하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교회는 여전히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하는 형편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고는 하지만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교인이 없는 빈 예배당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교회도 쌍방향 온라인 영상예배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시점을 맞았습니다.
사실 텅 빈 예배당에 대한 고민은 15년 전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될 때도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주말에 여가와 레저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당시의 예측이 절반은 맞은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젊은 세대는 실제로 교회를 떠났고 노년 세대만이 교회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년 세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 예배당의 빈자리가 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5일 근무제 때문이었을 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교회가 보다 유연한 태도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신학적 표준을 정립하려는 노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예배당으로 불러내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어떤 프로그램이 교회 밖 여가를 대체할 수 있을까 하는 것만 고민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발상은 교회와 교회 밖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편협한 신학에 기반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보다 넓은 지평이 필요합니다.
현재 다수 교회는 반드시 예배당에 모여야만 예배라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함께 모이지 않는다면 온라인을 통한 예배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저 역시도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대면예배를 요구하는 방역당국의 지침에 대해 일반 시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그럼 그동안 드렸던 온라인예배는 가짜였는가?' 하는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게다가 젊은 세대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 공간만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현실 세계 못지않게 인식하며 그 안에서 하루의 상당 부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학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전혀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선 공간적인 면에서 어떤 특정한 공간이 특별히 더 거룩하다는 이해를 포기해야 합니다. 더이상 성소와 지성소는 없습니다. 창조세계 어느 곳이나 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바로 그곳이 예배당이자 성소입니다.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304-30만이 좋은만남교회가 아니라 교우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은만남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런 확장성은 인터넷 가상공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돼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시간적인 면도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永遠)'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고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영원은 한 방향을 향해 가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이 아닙니다. '더킹 : 영원의 군주' 같이, 요즘에는 평행우주를 소재로 한 드라마도 많습니다. 또 인터넷 공간 안에서는 과거도 현재처럼 생생하게 소환돼 시간의 개념이 무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반드시 일요일 오전 11시에 일회적으로 고정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고정되지 않은 예배 시간은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삶으로 예배하는 신앙의 적극성을 요청합니다.
시공간의 현재성이라는 의미를 확장하면 우리는 오히려 자유롭게 되고 더 많이, 더 가까이,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상시적으로 온라인 오프라인 병행 가능한 예배 환경을 구축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3화 삶의 터전에 첫 발을 내딛다.(1)
고등학교 시절은 다사다난했다. 적응하지 못했던 학교생활로 몇 번의 가출과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했다. 추억이 남고 즐거워야 했던 고교시절이었지만 내 삶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버린 시절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성 친구 사귄 것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남는 일이 없다. 이렇게 고교생활과 방황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나는 더이상 학교에 정이 없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자기 수업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을 꺼려하셨다. ‘수학Ⅰ’ 선생님은 자기 수업시간에는 나가서 체육 하는 반에 가서 놀라고 하셨고, ‘日語(일어)’시간에는 매번 교실 뒤에 서서 수업을 듣던지 나가라고 하셨기에 나는 수업을 들어가지 않았다. 영어 선생과 국어 선생은 내가 체육을 잘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교내 체육대회 때 높이뛰기 1등을 한 경력이 있었기에) 나를 ‘스포츠맨’이라고 부르시곤 하셨다.
학교에 흥미를 잃은 나는 학교에 잘 가지 않았고, 그 시간에 뭘 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나의 진로선택은 다른 친구들보다는 조금 빠른 편이었다. 고3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했다. 대학 입시 공부를 할지, 아니면 직업을 배울지에 대해서 일찌감치 고민을 했고, 결국 고3 때는 학교 대신 외부기관에 위탁직업교육을 받는 직업반에 가기로 했다.

직업반은 월요일만 학교에 나가고, 나머지는 직업학교나 위탁교육 기관인 학원에 가서 교육을 받는 제도인데, 막상 닥치고 나니 뭘 해야 할지? 내가 되고 싶은 건 뭔지 뚜렷하지 않아 힘든 고민의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접고 점심 때쯤 친구 한 명과 집에 가는데, 고1 담임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선생님은 학교 근처 분식집에 나와 친구 한 명을 데려가서는 라면 하나와 김밥 한 줄을 시켜 주시며 나에게 조언을 해 주셨다. “친구들과 뭉쳐 다니면 너 인생 종 친다! 너랑 어울리던 애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는 건 어때? 앞으로 요리가가 뜰 것 같은데 요리학원을 생각해 봐!”라고 조언을 해 주셨다. 요리! 요리는 나에게 정말이지 낮 선 단어였고 없던 단어였다. 많은 고민 끝에 부모님께 말했더니 평생을 식당 주방에서 일하시던 어머니는 극구 반대를 하셨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나의 선택에 결국 어머니는 손을 들었고, 응원해 주시기로 하셨다.
고3이 되어 나는 학교 대신 학원으로 등교를 하였다.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신촌 로터리에 있는 ‘수도요리학원’이라는 곳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원원장이 아침방송에 나와서 요리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 다르게 보기도 했다. 요리를 배우는 것은 공부를 하는 것보단 즐거웠다. 배운다기보단 놀러 가는 느낌이었다.

당시 학원에는 여려 부류의 애들이 있었다. 서울 인근에서 나와 같이 학교 적응 못 하고 오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공부도 잘하고 바른 애들도 몇 명 있어 보였다. 어떻게 여차여차하다 보니 다행히도 나는 ‘양아치’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공부 좀 했던 애들인 은평구에 있는 ‘선정고등학교’ 애들하고 친분이 생겨서 공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학원이 끝나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도서관을 찾다 보니 안국동에 큰 도서관(정독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매일 출근하듯 가서 공부를 하였다.
문득 습관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려서 그래도 교회는 열심히 다녔던 터라 매일 가방에 작은 성경책을 하나 가지고 다녔다. 겉표지는 검은색, 옆면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 원초적인 성경이었는데 주일학교 때 받은 것을 닳고 닳도록 들고 다녔다. 매일 도서관에 도착하면 성경을 먼저 읽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문제집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집에 왔던 날이 많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목사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지나고 한식조리기능사에 합격하게 되었고,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자격증을 찾아오는 그 날의 장면이 아직도 내 인생에 하이라이트로 남아있다. 그날 장대비가 갑자기 내렸고, 나는 당시 교제하던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금화초등하교’ 앞에 있는 육교 밑에서 비를 피하며 여자친구에게 자격증을 자랑하며 보여줬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에게 있어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성취감! 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성취감은 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매번 실패자로 낙인찍혔던 나에게 삶의 의미를 조금 더 찾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지금도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작은 성취감으로부터 인생을 찾으라’고 말한다. 혹 인생에 실패와 낙심이 있을지라도 무엇에 성취감을 찾고,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생각이 전환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단순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생각은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늘 복잡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난제와 고민들이 우리를 제약하거나 억누르고 있을 때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쉽게 풀릴 한 가닥이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를 몇 시간째 풀고 있지만 풀리지 않고 더 꼬여갈 때 느슨해 있는 한 가닥이 전체의 문제를 풀어가듯이 상황을 잘 관찰하고 살펴보면 우리는 무엇이든 풀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론 단순하게 그리고 순진하게 문제에 접근할 때 작은 성취감으로부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그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자뭇 중생이 미래 세상에서 이 가르침을 듣고 믿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수보리여, 그는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닌 것도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여, 중생, 중생이라 하나 여래는 중생 아닌 것을 중생이라가 이름하였다고 설하였다.
爾時에 慧命須菩提가 白佛言하기를, 世尊이시여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聞說是法하고 生信心不이리이까. 佛言하시되 須菩提여,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여 衆生衆生者라 하나 如來說非衆生을 是名衆生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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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의 질문은, 과연 미래 세상에서 중생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믿겠느냐는 것인데 부처님 대답이 엉뚱하다. 미래에 중생이 믿음을 낼 것이다, 아니다로 대답하는 대신에 네가 말하는 중생이라는 게 그게 중생이 아닌 것을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설명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미래에 무엇이 어찌 될 것인지를 묻는 것은 쓸데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처에게는 ‘미래’라고 하는 것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은 깨달음의 길에 따만 방해가 될 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질문 자체를 못 들은 것으로 치고 제자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린다. 부답不答으로 정답正答을 내리신 것이다.
“베드로가 둘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21:20~22)
예수님도 한눈파는 제자에게, 시선을 거두어 유일한 현실인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고 이르신다.
혜명慧命은 ‘지혜로운 노인’이라는 뜻으로 새긴다. 명命은 수壽요 수는 노老다.
“부처님께서 그는 중생이 아니고 중생 아닌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르침을 듣는 자들이 중생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줄로 잘못 알까봐서 그는 중생이 아니고 업연業緣 가운데 나타났다가 업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니 어찌 참되고 알찬 중생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요, 그러나 또한 중생의 몸이 여기 이렇게 있거늘 어찌 중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중생 아닌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王日休)
부정되어야 할 것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다.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하는 체體에 대한 단언斷言도 마찬가지로 부정되어야 한다.
‘무엇’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 곧 그 ‘무엇’은 아니다. ‘중생’이란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무엇’에 붙여진 가명假名에 불과하다. 그러니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따라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다. 물론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

부산 할매가 자판기 앞에서 동전 500원을 넣고는 자판기를 톡톡 치며 조용히 말했다.
“보소, 콜라 하나 주이소!!”
하지만 자판기는 무소식이다. 그래서 부산 할매는 자판기를 치며 소리를 좀 높여 말했다.
“보소, 보소, 콜라 달라 안하요!”
그래도 무반응이다. 열 받은 부산 할매가 자판기를 열심히 치고 패고 닥달을 하고 있는데 이 때 멀리서 지켜 보던 밀양 할매가 한심 하다는 듯 사부작 사부작 걸어오더니 말을 걸었다.
“보소, 그런다고 나오는교....??”
열심히 발길질을 하던 부산 할매가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면 우째야 되는 데요??”
밀양 할매가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하듯 부산 할매에게 말했다.
”한 번, 딴거 달라 해보소!!”
자기가 하면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을 사는 데 재미가 있습니다. 이 착각을 받아줄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책상 위에서나 침상에서 공상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 중에 실행하는 자리에 앉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엉뚱한 정책을 남발함으로 그 동안 애써 일구어 놓았던 일들을 중도에 망치거나, 책임지는 일은 하지 않고 아래 사람을 갈구는 데 정력을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문득 최근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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