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감사'의 달]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11월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한 해의 결실을 감사하는 달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 생활이 많이 위축되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돌아보면 모든 발걸음마다 스며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및 왕국절 제10주일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한 해 동안 베푸신 은혜와 결실을 되돌아보며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주일 떡을 준비하였습니다. 꼭 받아가십시오.
2. 예배당에서 대면예배를 드리지만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하여 방역수칙을 잘 준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당 출석이 어려우신 분은 온라인 비대면 예배로 참여해 주십시오.
3. 오늘 예배 후에 김형휘 성도님, 임정희 집사님 댁 이사 축하 심방을 하겠습니다.
4. 다음주일 오후에는 교회 월동준비, 김장을 하겠습니다.
5. 셋째 주일(15일) 오후에는 강화 이필완 목사님 댁에서 농촌생태활동을 하겠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함께해 주십시오.
6. 교우와 가정의 평화와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 다음주일(11월 8일, 왕국절 제11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방현섭 목사 / 기도 : 윤성일 집사
봉헌위원 : 박순용 집사 / 성찬보좌 : 송윤혁 집사 / 안내 : 오호숙 권사

목회서신
별 소득 없는 것 같은 추수감사절이지만…
추수감사주일을 맞았습니다. 올 한 해는 코로나19 때문에 평화통일기도주일이나 야외예배 등 주일 행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지나왔는데 연말을 즈음하여 추수감사주일은 지킬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옛날처럼 추수감사주일이면 교회에서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아이들 재롱잔치도 하면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조촐하게 보내기는 하지만 우리가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인생의 결산을 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좋은 일들은 더 큰 열매를 맺도록 노력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올해는 사실 코로나라는 놈 때문에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마냥 여유롭고 편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낯선 상황들에 대비해야 했고 또 갑자기 그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했기에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지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 올 한 해도 결실을 맺긴 하였습니다. 그동안 저나 우리교회, 한국 교회가 일상적 습관에 너무 젖어서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깨지는 경험을 통해서 오히려 더욱 일상적으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발견하였고 그동안 우리가 확신하고 붙들었던 교리적 신앙적 개념들이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2020년은 저에게나 교회에게나 매우 중대한 도전의 시기였고 혼란의 시기였으며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흉년과 같았지만 언제나 함께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이 앞으로도 함께하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8일 국회에서 열린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국제사회와 함께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해 2050년 탄소중립(넷제로)을 목표로 나아가겠다"고 밝혔습니다. 단소중립이란 온실가스 제거량과 배출량의 합이 0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문 대통령은 탄소중립을 위해 신재생에너지 확대, 전기·수소차 보급, 저탄소·그린산단 조성 등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석탄화력 발전 비중을 5% 이내로 줄이고 수소를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거나 전기·수소차를 2,000만 대 이상으로 늘인다는 것입니다. 한편 경영계는 대기업에 대한 환경 규제와 비용에 대해 우려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 중국, 유럽연합, 영국이 이미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겠다고 선언하였고 120여 개 국가들이 동참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UN에 구체적인 계획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 6억1천6백만 톤(2019년)으로 세계 9위입니다. 학자들은 2035년에 기온이 2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하며 그때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환경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자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미래의 공동 유산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탐욕은 지구를 뜨겁게 달구고 자멸의 문턱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부디 모든 생명이 함께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 나가도록 인도하십시오.

소그룹의 활성화가 해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일전의 설교를 통해 코로나19 이후 개신교인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가 '거리를 두고 싶은', '사기꾼 같은' 것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인이 원하는 종교인(성직자, 신도)의 이미지는 성숙한 인격(77%), 높은 도덕성(68%), 사회봉사와 기부(36%)라는데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그런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음이 더욱 드러난 것 같습니다. 이런 결과는 코로나 시대가 종식된 이후에도 국민이 개신교에 호감을 갖지 않고 선교에 호응하지 않으리라는 우려를 하게 합니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19 이후 주일예배를 아예 드리지 않는 개신교인이 증가하고 있다는 조사도 발표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응답이 4월에는 13%였는데 7월 조사에서는 18%로, 5% 증가하였습니다. 또 코로나가 종식돼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2%(4월)에서 6%(7월)로 증가하였습니다. 주일예배는 반드시 예배당에서 드려야 한다는 인식도 3개월 사이에 낮아졌고(41%→29%), 따라서 온라인 예배도 주일성수라는 의견도 55%에서 61%로 늘었습니다. 주일 오전 11시라는 고정적 시간과 예배당이라는 고정적 공간에 대한 당위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교인들은 교회가 온라인 시스템 구축과 콘텐츠 개발을 중점적으로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2명 중 1명(47%)이 응답하였고 목회자들은 성도 간 교제 및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41%)고 응답하였습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예배는 아쉬운 대로 온라인 영상으로 대체가 가능하겠지만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이 필요한 성도 간 교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최근 연구 조사에 따르면 소그룹 활동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교회가 전체 만족도도 높다고 합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주간리포트 [넘버] 66호는 "코로나19가 종식된다하더라도 비대면 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남을 것이다. 코로나 종식 후 공동체성 회복이 한국 교회의 최우선적 과제가 될 텐데, 소그룹 활동, 소그룹 구성원의 인식, 가족 개념의 확장 등 소그룹 중심의 교회 사역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헤쳐나갈 돌파구가 있다면 우리 연구소는 그중 하나가 '소그룹'이라고 판단했다.(일부 발췌)"라고 적고 있습니다.
코로나와 관계없이 교회는 지금 심각한 양극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 양극화는 세대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화 문제입니다. 논리적 언어체계와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교회의 전통적 언어와 위계적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교회 출석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신앙 자체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대부분 부모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언어와 문화의 문제가 코로나19로 더욱 부각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를 하나로 묶는 것은 자멸의 길을 고집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전체 예배는 비대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교회는 비대면 소그룹 활동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대별 소그룹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적 소그룹, 취미와 관심사를 엮는 소그룹, 신앙 서적을 읽고 나누는 소그룹 활동을 통해 성도의 교제를 이어가는 것이 활력을 잃어가는 교회에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속회 모임을 재건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것은 바쁜 일상에서 종교 활동을 위한 시간을 기꺼이 배분하려 하는 동기 부여의 문제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자기 결단과 신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동안의 교회가 수동적 충성을 요구하였다면 앞으로는 더욱 능동적 자기 참여와 헌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44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린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힌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25:44-46(새번역)
위 본문이 포함된 성서의 단락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의미심장한 소제목이 달려있습니다. 이 ‘최후의 심판’ 단락은 26장부터 시작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행적 바로 앞부분에 위치함으로써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여러 설교 중 그야말로 절정 부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후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가 가장 명확하게 강조되고 있는 단락인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관인 왕(주님)을 등장시켜 그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의인과 형벌을 받을 죄인을 선별하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묘사하는데 그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왕 자신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외면한 이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형벌을 받게 된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항변합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본적도, 외면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왕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우리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향하여 주님을 대하듯 함께하는 이들만이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단 실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어서만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며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써, 좀처럼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홈리스는 가장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자신의 주거지를 거점으로 자가 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가장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자신만의 주거지가 불안정하여 거리와 집단쉼터를 배회하는 홈리스야 말로 감염병에 가장 취약한 상황이지만 그 어떤 언론도 홈리스의 인권을 이야기 하지 않고, 정부 시스템도 홈리스를 위해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 6월 전국민에게 보편지급 한다던 긴급재난지원금조차 홈리스 중에서는 그 신청률이 35.8%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전국민 신청은 99.5%) 주거지가 불안정한 홈리스 일수록 ‘주민등록지의 불일치’, ‘신원증명수단의 부재’ 등 빈곤이 만들어낸 신청 장벽으로 인해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이들의 몫소리(생명을 담은 울부짖음)는 들리지 않고, 이들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지난 10월 17일 ‘세계빈곤철폐의 날’을 맞이하여 홈리스 당사자들은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 못보는가 안보는가 코로나 속 가난한 사람들을!”이라고 외치며 ‘가난한 사람들의 코로나19 요구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불의한 사회’는 ‘불의한 눈’을 가진 ‘불의한 인간’을 양산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과연 너희는 못보는가, 안보는가.
- 기도
혹한의 시린 날씨 속에서 오늘 밤에도 한 몸 뉘일 곳을 찾아 헤매는 그 서글픈 발걸음 가운데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아가 빈곤의 굴레와 차별의 시선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홈리스의 인권이 온전하게 보장되기를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26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여래를 보겠는가? 수보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여래를 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수보리여, 만약에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도 여래겠구나.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하신 뜻을 헤아릴진대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여래를 보지 못합니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 須菩提가 言하기를 如是如是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佛이 言하시기를 須菩提여, 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면 轉輪聖王도 卽是如來로다. 須菩提가 白佛言하기를 世尊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할진대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
“세존께서 크신 자비로, 수보리가 모습에 집착하는 병을 없애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이렇게 물으셨다. 수보리가 부처님 뜻을 미처 모르고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으니 벌써 미혹된 마음인데, 다시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여래를 본다고 말한 것은 미혹된 마음을 한 번 더 드러낸 것이다. 진리에서 멀리 떨어졌으므로 여래께서 그 미혹된 마음을 없애고자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도 여래겠구나 하셨다. 전륜성왕이 비록 서른두 가지 모습을 갖추었다 하나 어찌 여래와 같겠는가? 세존께서 이 말씀을 하심은, 수보리의 모습에 집착하는 병을 떨쳐 버리고 그 깨달음이 깊게 사무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수보리가 물음을 듣고서 미혹된 마음이 한꺼번에 풀어지는지라, 제가 부처님 말씀하신 뜻을 헤아릴진대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六祖)
수보리가 아라한인데 어찌 그와 같은 미혹을 아직 지니고 있겠는가? 후세 중생으로 하여금 모습(相)에 집착하는 병을 떨쳐 버리게 하고자 짐짓 방편으로 모르는 척하여 부처님의 다음 게偈를 이끌어 냈다고 볼 수 있겠다.
앞에서 주어를 수서수소隨擧隨掃했으니(‘나’도 ‘범부’도 있지만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술어를 들었다가 지울 차례다.(여래를 32상으로 보지만 32상으로 여래를 보지 못한다.)
모양 있는 몸 속에 모양 없는 몸이여!
금향로金香爐 아래 철곤륜鐵崑崙이로다.
저마다 알고 보면 내 집 물건인데
하필이면 영산靈山의 세존께 물으리요.(川禪師)

서재에 있는 스승은 제자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잠시 독서가 끊겼다.
제자는 스승이 너무 고마웠기에 와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단지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스승은 책을 내려놓고 안경 너머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제자는 어리둥절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다가 결국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되물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냐?”
사랑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에서 나오고, 아픔은 사랑의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아파하는 사람의 아픔을 아시고 찾아가시고 우셨으며 그 아픔을 치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파하는 그 아픔에 우리도 아파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파하시며 찾는 곳이 어디입니까?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