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20.10.03 16:04

2020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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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진리'의 달]
진리(眞理)는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나 변치 않는 가치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영원한 가치가 없는 일리(一理)나 무리(無理)를 진리로 여기며 헛된 것에 자신을 바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로 깨우치고 진리로 자유케 되어야 합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6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8주일입니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이 땅 위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코로나19 감염확산으로 인하여 주일 오전 예배를 비대면 온라인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명절 귀성으로 인한 감염 확산 여부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추후 예배당 모임을 고려하겠습니다.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인내하시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시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연로하신 분들과 교우들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4. 감리교회의 행정권자인 감독회장과 연회감독 선거가 12일(월)에 있습니다. 더이상 소송에 휘말리지 않고 좋은 지도자를 뽑아 감리교회가 정상화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다음주일(10월 11일 . 왕국절 제7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방현섭 목사 / 기도 : 이재원 성도
봉헌위원 : 민지애 사모 / 성찬보좌 : 정지수 집사 / 안내 : 고남곤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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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보수적 지도자의 죽음이 남긴 질문
 
얼마 전 이름만 대면 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수를 자랑하던 감리교회의 목사님이 세상을 떴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안수 보좌를 하셨던 전(前​) 감독입니다(제가 원한 것은 아니고 연회가 지정한 감독이 안수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의 부흥기에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를 초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기도 했지만 부흥회를 통해 많은 교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감리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자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의 기억에 별로 좋은 분으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사였던 그분은 자유롭고 학문적인 신학대학의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겨 유능하고 유명한 신학교수들을 대학에서 쫓아내는데 앞장서는 등 감리교회를 보수화한 분이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변선환 학장 종교재판의 주역입니다. 제 개인적 소견으로는 지금 감리교회가 보수화되고 학문성이 실종된 것이 다 그분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분은 유명한 텔레비전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길 잃은 목자'로 소개되어 불륜, 횡령 의혹 등이 제기되었으며 재적교인 9만 명의 교회를 아들에게 편법으로 세습, 최근에는 전광훈 목사의 '영적 아버지'로 알려지는 등 자랑스럽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노년에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외부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존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난하거나 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의 일생을 보면서 과연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가 지키고 이뤘던 보수적 신념과 목회 일념이라는 소신이 지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좀 더 열린 삶을 살았더라면 그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좋았을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삶에 의미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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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엥쿠앙에서의 둘째 날은 게스트 하우스에 있는 모닥불 앞에서 시작되었다. 여름나라이긴 하지만 씨엥쿠앙은 고도가 높은 지역이기 때문인지 아침 저녁으로 상당히 쌀쌀했는데 모닥불 앞에서 마시는 따뜻한 모닝 커피 한잔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모닥불의 모양이 범상치 않았다. 특이하게도 거대한 포탄껍질 속에서 장작불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함께 자리했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서는 짧은 영어로 과거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폭격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주셨다. 폭격은 10년 가까이 멈추지 않았고, 그 무지막지한 강철비가 남기고 간 잔해는 이 곳의 일상풍경이 되었다고 한다. 남겨진 포탄 껍질은 모닥불을 피우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울타리나 대문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냄비, 컵, 전등 등 생활 용품으로 가공하여 사용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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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어제 오늘 우리가 씨엥쿠앙에서 들어가는 식당마다 똑같은 숟가락을 만났었다. 처음엔 이런 형태의 숟가락이 라오스에서 유행인가 싶었는데 그것 또한  불발탄 파편으로 만든 ‘불발탄 숟가락’이었다. 둘째 날 낮에 우리는 조나단 선생님을 따라 이 숟가락이 생산된 <반나피아> 마을을 직접 찾아갔다. 소위 ‘스푼 빌리지’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너무나 가난해서 지천에 널려있는 폭탄조각을 주워다가 숟가락으로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파편조각을 일일이 불에 녹여서 주물 숟가락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덥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가난과 전쟁의 흔적이 모두 담겨 있는 불발탄 숟가락! 이 숟가락의 존재는 참으로 서글펐지만 다른 한편으로 라오스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수십 년간 사람들을 죽이던 잔인한 무기가 어느덧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숟가락은 이제 일용한 양식을 섭취하는 도구에 머물지 않고,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일구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이 숟가락을 통하여 라오스의 전쟁과 불발탄 문제를 알게 되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숟가락 같은 역할을 해야 겠구나. 반나피아 마을에서의 경험은 시엥쿠앙에 지냈던 2박3일의 일정 중에 가장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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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엥쿠앙에는 세계적인 미스터리로 불리는 <항아리 평원(Plain of Jars)>이 있다. 라오스의 오래된 유적이며 관광지인 항아리 평원에는 항아리 모양 같기고 하고 술잔 모양 같기도 한 돌 웅덩이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는 평원이다. 역사학자들이 지금까지도 항아리의 생산시점과 명확한 용도를 알 수 없다하니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시엥쿠앙에는 총 3개의 거대한 항아리 평원이 있는데 우리는 제 1평원을 둘러보았다. 넓은 들판에 항아리들이 군집해 있었고, 안타깝게도 주변 여기저기에 전쟁 때 생긴 커다란 폭탄의 탄흔들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웅덩이 같은 탄흔들 옆으로는 파괴되어 있는 항아리들도 많았는데 전쟁이 세계적인 유적지라고 해서 가만두었을리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탄흔 위로 돋아난 푸른 풀들이 그나마 비극적인 역사의 황량함과 잔혹함을 조금 가리고 있었는만 작은 풀들로 전쟁의 상처가 다 덮여지지도 치유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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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엥쿠앙을 떠나는 마지막 날, 조나단 선생님은 우리를 <탐피유 동굴>로 안내해주셨다. 이 곳을 떠나기 전에 꼭 두 눈으로 확인하길 바란다는 말씀으로 시작된 탐피유 동굴의 이야기는 혹 제주 4.3 사건의 다랑쉬 동굴이나 노근리 학살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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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당시 이곳 시엥쿠앙은 라오스 빨치산 공산주의자들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은 10년간 한시도 쉴 날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던 탐피유 동굴을 향해 수십번의 집중폭격이 가해졌다. 결국 1968년 11월 24일 동굴 안에 있던 민간인 437명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채 폭사하는 참변이 발생하고 말았다. 
동굴 안에 들어가보니 수많은 향이 서글픈 모양으로 각자의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마도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방문객들이 피어놓은 향일텐에 437명이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도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당시의 현장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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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운명과 거의 비슷한 라오스의 비극을 접하면서 이 땅에 전쟁의 소식이 언제쯤 멈출까. 참 암담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없이 연기를 피워내며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려는 이들의 발걸음을 확인하면서 또 다른 희망의 근거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사라져버릴 연기일지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오르길."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이 기도했다.
 
2019년 12월 21일 - 12월 23일 라오스 씨엥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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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또한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어서 이를 이름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 것이니 나·사람·중생·목숨 없이 모든 좋은 법을 닦으면 곧 아누다라삼먀사보리를 얻으리라. 수보리여, 좋은 법이라고 말한 것은, 여래가 설하기를, 좋은 법이 아니요 그것을 이름하여 좋은 법이라고 한 것이다. 
 
復次로 須菩提여. 是法은 平等하여 無有高下라,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須菩提여,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卽非善法이요 是名善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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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속에 진성眞性을 지니고 있음은 동일하다. 그래서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였다. 색신色身에는 고하高下가 있고 진성眞性에는 고하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것을 이름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라고 한다는 말은, 진성에는 본디 나·사람·중생·목숨(我人衆生壽者)이 따로 없고 이 네 가지는 헛된 인연으로 말미암아 드러나 보이는 것이라. 진성은 평등하니 어찌 네 가지 다른 것이 따로 있겠는가? 그래서 이름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좋은 법(一切善法)이란, 부처님께서 중생을 이끌어 진성을 밝게 깨닫도록 하시는 법을 말한다. 이 법에 기대어 수행을 하면 곧 아누다라삼먁삼보리의 진성을 얻게 되거니와 그 진성은 나에게 본디부터 있는 것이라 어찌 그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개 무엇을 얻는다고 말하면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을 가리키는데, 진성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래서 얻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이름하여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좋은 법이라고 말했지만 좋은 법이 아니요 그것을 이름하여 좋은 법이라고 한 것이라 하셨다. 이는 본래 그와 같은 좋은 법이 있는 게 아닌데 잠시 그것을 빌려서(假此) 중생을 깨닫게 하신 것이므로 좋은 법이라는 허명虛名을 쓰신 것일 따름이다.”(王日休)
 
“상相에 머물지 않으니 곧 비선법非善法이요, 복을 빠뜨리지 않으니 이름하여 선법善法이다.”(李文會)
 
“초선初善, 중선中善, 후선後善이 있으니, 초初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처음 낼 때를 말한다. 이때에는 생각 생각마다 정진精進을 생각하고 의심하거나 게으름 피우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중中은 한결같이 모든 선법善法을 닦고 진성眞性을 깨달아 어떤 법상法相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후後는 선법을 깨뜨려 버리고 모든 선악범성善惡凡聖과 잡고 버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비워 평상무사平常無事함을 말한다. 그래서 비선법非善을 이름하여 선법善法이라 한다고 했다.”(法華經) 
 
물과 뭍이 같은 진제眞際요
나는 것과 걷는 것이 같은 몸이라.
법 가운데 어찌 이쪽 저쪽이 있으며
이치(理) 위에 어찌 멀고 가까움이 있으랴?
나와 남을 가려 나누지 않고
높고 낮음에 집착하는 마음을 비워
이 평등성平等性을 깨달으면 다 함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리라.
(傳大士) 
 
길을 떠나서는 길을 갈 수 없다. 그러나 길에 달라붙으면 또한 길을 못 간다. 길을 간다는 것은 길에서 길을 떠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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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큰 정신병원의 구급차를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있었다. 어느 날, 여전한 일과로 환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차를 돌리려고 하는데 병원의 위층 창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 좀 보시요!” 
운전기사가 소리가 나는 병실 위층을 바라보니 병실 창문에 상체를 내어놓은 사람이 있었다. 운전기사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나 말이요?” 
그러자 내다보던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소.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 보아도 되겠소?” 
운전기사는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환자가 말했다. “당신은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 본 일이 있소?” 
운전기사는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네!’ 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훗날, 그 운전기사는 고백했다. “나는 15년 동안 이 병원에서 일하며 매일 정신병 환자를 운반하면서도 나의 건강한 정신에 대하여 한 번도 감사해 본 일이 없었음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감사의 분량이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의 척도”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일상적인 평범한 생활 속에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은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감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임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넘치는 감사는 받은 은혜를 은혜로 안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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