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8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0주일입니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이 땅 위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코로나19 감염확산으로 인하여 별도 해제 조처가 있을 때까지 주일 오전 예배를 오전 10시에 현장 대면과 비대면 온라인으로 병행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주일부터는 상황을 봐서 예배를 정상화 할 계획입니다.
3. 우리교회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으니 설치하시고 유용하게 활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연로하신 분들과 교우들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5. 헌금을 입금하신 분들은 한효균 재정부장님께 헌금내역을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6. 지난주의 감리회 선거에서 이철 목사(동부연회)가 감독회장으로, 이광호 목사(도봉교회)가 서울연회 감독으로 당선되었습니다.
■ 다음주일(10월 25일 . 왕국절 제9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박성중 목사 / 기도 : 오호숙 권사
봉헌위원 : 민지애 사모 / 성찬보좌 : 정지수 집사 / 안내 : 고남곤 권사

목회서신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소송전 시작...
출발부터 삐걱거렸던 감리교회 제34회 총회 감독회장, 감독 선거가 우여곡절 끝에 치러졌습니다. 연회 감독 선거는 별 탈 없이 잘 진행되었지만 감독회장 선거는 법원 가처분신청으로 뒤늦게 후보 등록이 인정된 후보의 합류와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 제공을 과도하게 제한한 선관위에 대한 불만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결과는 뒤늦게 3번으로 합류한 동부연회 이철 목사(강릉중앙교회)가 투표자의 과반수를 넘는 55.9% 득표로 감독회장에 당선이 되었고, 서울연회 감독은 도봉교회 이광호 목사가 14표 차이로 상대 후보를 이겼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마치자마자 총회 재판위원회에는 두 건의 선거 무효소송이 접수되었습니다. 감독회장 당선자가 유권자들에게 도자기 선물세트와 식사를 제공했다는 것과 후보 등록 무효 가처분 신청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여론조사를 빙자한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는 것, 지방 경계법을 위반하였음에도 선관위가 후보로 포함시켰다는 것 등 당선자와 관련된 혐의와, 뒤늦게 후보 등록이 이루어져 이미 우편투표가 실시된 해외 유권자들의 선택권을 침해되었다는 이유, 감시원 교육과 합동정책발표회 등 선거 일정이 생략 혹은 무시되었다는 이유로 선거관리위원회가 피소를 당한 것입니다. 모처럼 감리교회가 정상화될 기회였는데 다시 소송전에 휘말리게 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번 선거에는 개혁 성향의 후보가 출마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28%를 득표, 기성 정치권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실감하였습니다. 교세와 금권선거, 불법으로 감리교회를 진흙탕에 빠지게 했던 당사자가 다시 당선되는 현실에 많은 사람이 실망을 금치 못하였지만 선거 제도의 불합리성과 목회 연한(장로 안수 연한)으로 선거권(과 총대 자격)을 주는 제도의 폐쇄성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다시금 확인한 것이 그나마 결실이라면 결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소수자 축복 이동환 목사에게 정직 2년이 선고되었습니다.
성소수자인 교인의 부탁으로 성소수자들의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하여 예배에서 축복의 의식을 진행하였던 이동환 목사에 대한 경기연회 재판위원회의 재판이 지난 15일에 열렸습니다. 위원회는 이 목사의 행위가 동성애자에 대한 찬성 및 동조이며 장정에 명시된 동성애 및 지지 금지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고 판단하여 최고 수준의 형량인 정직 2년을 선고하였습니다.
이 목사는 판결에 대해 "우리는 모두 오늘 이 판결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 몇 달간 감리교가 보여준 낮 뜨거운 행태, 도를 넘어선 비난, 졸렬한 사상검증과 색출작업, 그리고 오늘 판결까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도대체 이 판결에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저에게 형벌을 내리고 목사의 직위를 박탈하고 교단 밖으로 쫓아낼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과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과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목회적 신념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라며 판결에 불복한다고 입장을 밝혔고 대책위원회도 "무지와 혐오, 편견에서 비롯된 폭력과 정죄를 방관할 수 없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서에 동성애자(성소수자)에 대한 금지 조항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유독 소수 약자를 상대로만 마녀사냥을 벌이는 교단의 행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모저모
우리교회 스마트폰 어플을 만들었습니다.
컴퓨터게임 제작을 전공하는 방정혁 학생에게 요청하여 우리교회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간단한 교회 안내문과 홈페이지 접속, 줌 온라인 예배 참여 링크의 단순한 기능만 있는 앱이지만 교우들과 우리교회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온라인으로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데 의미가 있겠습니다. 차후에 기능을 좀 더 확장하고 모양을 세련되게 개선할 계획이니 여러분이 많이 활용하시며 베타테스터로 기꺼이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4일 이수혁 주미대사가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국이 70년 전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70년간 미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국익이 되어야 미국을 선택하는 것이다" 등의 발언을 한 데 대해 야당이 "이 대사는 지금이라도 한미동맹을 훼손하고 국익을 저해한 발언에 대해 국민과 국회 앞에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것"을 요구하며 한미동맹을 훼손 발언이라고 논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보수 일간지 3사도 "'내가 묻고 싶다' 국감장서 큰소리, 이수혁 주미대사 태도 논란"(조선일보), "국민의 힘 '이주혁 주미대사, 中엔 찍소리 못하더니 美엔 왜 시비?(동아일보)" 등의 제목 기사를 내보내며 일제히 이 대사를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여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동맹에서 국익이 중요하다는 발언이 왜 논란이 되고 왜 공격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의아하다, 동맹을 신성시하는 태도는 지나치며 급변하는 질서 속에서 국익 극대화는 외교전략의 기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추종적 사대주의의 사고와 정쟁을 위한 비판을 그치고 주권국가의 존엄을 되찾는 노력이 시급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미국과의 동맹에서 주권국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마치 동맹 파괴라도 되는 듯 호들갑 떨며 비난하는 국회의원과 언론이 기가 막힙니다. 외국과의 동맹이 자국의 이익과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리라는 믿음은 역사에서 이미 어리석음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의 쓸데 없는 정쟁을 중단하기를 빕니다.

(41) 왜 사냐건
1
수업의 시작입니다.
“넌 왜 사니?”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물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책상 사이를 또각또각 걸어가 꼭 한 학생만 지목해야 합니다. 그 앞에 조용히 다가가 학생의 얼굴을 눈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왜 사냐고.”
“네?”
“너 왜 사냐고.”
그럼 그 학생의 옆 학생부터 터지기 시작하는 웃음이 옆으로 옆으로, 그 앞으로 옆으로 확 그리고 뒤로. 화선지에 번지는 옅은 먹물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학생의 대답 때문이었습니다.
“과학 문제 풀려고요.”
서슴지 않고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는. 수업 시간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이 학생은 과학 문제를 풀기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 느꼈을지 모를 만큼 거침없는 대답이었습니다. 학생의 당황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당한 느낌이랄까.
그리고 두 번째 실수가 더 문제입니다. 온라인 수업이었습니다. 비대면 수업이 가진 분위기. 대화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대화가 펼쳐지는 상황이 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상황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습니다. 솔직히 까먹은 겁니다.
“넌 왜 사니?” 질문에 모두 필요 이상 진지해질 거라는 상상은 상상이 아니라 몽상입니다. 도대체 누가 온라인 양방향 수업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인지. 온라인 수업은 양방향 수업이 아니라 한방향 수업이 단발적으로 연속되는 수업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일 지도 모르겠지만
2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중요합니다. 이 물음을 던진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물음이 갖는 특징 때문입니다. 이 특징은 바로 언제, 어디, 누가, 어떻게, 왜, 무엇을 상상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지 않던 질문이 특정한 상황이 되어 다가온 후에는 통과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벽이 되어, 게다가 더할 수 없는 진지함까지 요구하며 이마에 딱하니 닿게 됩니다. 그 순간 모두는 답해야 합니다.
“삶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진심으로 나는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텅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 우리는 자기 자신을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는 거북한 존재다. 어느 누구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모든 존재가 저마다 혼란한 마음과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를 ‘남아도는 불필요한 존재’라고 느낀다.” - 사르트르, 『구토』, 방곤 옮김 (문예출판사, 1999)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소설 『구토』입니다. 그는 소설에서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가져온 결론을 주인공 로캉탱의 입을 빌려 ‘남아도는 불필요한 존재’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기사 그럴 것이 아무런 계획도 없고 의미도 없는 반복된 듯한 삶을 사는 로캉탱. 그가 존재의 바닥을 향할 때 ‘남아도는 불필요한 존재’는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남아도는 불필요한 존재’라는 절망적 자기 인식에서 다른 것으로 이끕니다. 바로 ‘존재의 바닥’입니다. 그 존재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치열한 질문 없이는 무엇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덮기. 모른 척하다 모르게 되기. 그저 다시 묻지 않는 의미 없음의 반복으로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합니다.
3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요.
갱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 웃지요.
김상용(金尙鎔, 1902~1951). 일제강점기를 걸친 시인이자 번역가입니다. 시에서 마음에 와닿은 구절이 있습니다. ‘왜 사냐건?’ 물음과 그 답 ‘웃지요’입니다.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 과학 문제를 풀겠다는 대답과 그 삶에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안타까운 건 과학 문제를 풀고 있는, 지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또는 인도하지 않는 교육과 이렇든 저렇든 질문하지 않는 그 존재입니다. 바로 눈앞의 이利와 관계한 것들, 그것에만 집중하느라, 가르치느라, 속느라 어느 날 반드시 다가올 ‘왜 사는가?’ 질문에 등한시하는 건 아닌지.
4
“그럼, 선생님은 왜 사세요?”
조그만 창의 한 아이가 묻습니다.
분명한 것은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 정답은 없습니다. 답이란 게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려야 하는 이들 모두를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물음에 직면해야 한다면, 집중해야 하는 ‘나’라는 주체들은 있습니다. 이들은 이 질문에 ‘남아도는 불필요한 존재’라는 바닥까지 내려갈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존재의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김상용과 관계없이 ‘웃지요’를 해석할 것입니다. 웃음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웃음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 뒤 웃음입니다. 힘들다는 이유로 웃음을 던져주려고 합니다. 이 웃음에 취합니다. 아이들에게 단순한 웃음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역시 필요합니다.
“잘 모르겠다. 내게 아직 답이 없고 또 답이 있다고 하더라도 네 답은 아닐 것 같고. 그러니 같이 고민하자.”
아이에게서 김상용의 웃음을 보았습니다.
25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대들은, 여래가 내 마땅히 중생을 구원하노라 생각한다고 말아지 말아라. 수보리여, 그런 생각은 하지 말 것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실로 여래가 구원하는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여래가 구원하는 중생이 있다고 할진대 여래는 곧 나·남·중생·목숨을 따로 지닌 자가 된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汝等은 勿謂니, 如來가 作是念하기를 我當度衆生이라 하라. 須菩提여,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라. 若有衆生如來度者인대 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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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은 여래가 저기에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나·남·중생·목숨이 따로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중생이 따로 없다.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다는 말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나’ 속에 들어있는데 어디서 구원할 ‘너’를 찾겠는가?
그렇다면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은 허언虛言인가? 그렇지 않다. 아침에 동산으로 해가 뜬다는 말이 참말인 그만큼,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도 참말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진다고 말하지만 실은 아침이나 저녁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요, 더욱이 해는 뜨고 지고 하는 물건이 아니다. 요컨대 해가 뜬다고 말하고 나서 그런데 해는 뜨지 않는다고 말하라는 얘기다. 그래서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은, 내 마땅히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을 내되 일체 중생을 구원하였으면 한 중생도 구원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는 것이다.
“중생은 한없고 까없는 번뇌 망상을 일으켜 선·악·범·성善惡凡聖이 따로 있다는 견해를 지니고 취사 분별하는 마음이 있어 어리석은 정情이 보시菩提의 성性을 덮어 버린 사람이다. 부처님은 세상을 벗어나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어 육적六境(六賊, 즉 여섯 가지 인식의 대상. 마음을 빼앗아 가므로 賊이라 함)을 무릎 꿇리고 삼독三毒(탐욕·성냄·어리석음)을 끊고 나와 너를 지워 버리도록 가르치시는 분이다. 만약에 능히 사람과 법이 둘 다 공임을 깨달아 도무지 헛된 생각이 일지 않고 마음이 늘 비어 있어 고요하고 그윽하여 맑고 깨끗하다면 다시 무슨 의혹에 털끝만큼이라도 머물겠는가? 그래서 견성見性하면 구원할 중생이 없다고 한 것이다.”(李文會)
“사두(sadha, 聖人)와 죄인은 같은 실체의 다른 모습이다. 둘 다 ‘아트만’의 현현이다. 깨끗하지 못함의 덮개가 사두의 ‘아트만’에서는 사라져 없고 죄인 위에는 더욱 두꺼워진다. 이 둘을 같은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보통 사람의 수준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간디)
맑게 갠 하늘도 하늘이고 구름 낀 하늘도 하늘이다. 어떤 하늘이 어떤 하늘 위에 또는 아래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