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형제를 죽이다 (3)
(창세기 4:1-8)
* 제물에 담긴 마음과 정성(2)
어렵고 힘들 때에는 하나님이 축복을 내려주시면 온갖 좋은 것으로 감사를 드릴 것처럼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상황이 괜찮아지면, 그게 쉽지 않습니다. 내놓기가 아까워집니다. 여기도 저기도, 쓸 데가 좀 많은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큰일을 겪으면서 도움을 받으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도 시들해지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월이 지난 뒤”라는 시점은 그런 감사의 마음도 식고 자기 성취에 만족해서 “이건 내가 땀 흘려 이룬 건데 뭘” 하는 마음이 생길 만한 때입니다. 그 시점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두 형제는 따로따로 하나님에게 제물을 바쳤으나, 한쪽은 그다지 기쁘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한 자”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창세기 4:4-5)
이 대목을 대충 읽고 넘어가면, 하나님은 아벨이 바친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거부하셨다고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물만이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친 존재 자체가 함께 언급됩니다. 아벨은 양을 쳤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고 하나님이 육식체질이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밭에서 나는 곡식보다 양고기를 좋아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물 자체를 가지고 평가한 게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친 주체, 아벨과 가인을 주목하십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제물보다 앞서서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물을 바친 그 존재 자체가 판단의 기준입니다. 아벨의 경우에는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언가 특별히 선택했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는 반면, 가인은 “땅에서의 소산” 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을 뿐이지 그 소산에 대한 특별한 자세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비교해볼 때에 아벨은 “과연 어느 것이 좋을까?” 하고 깊이 들여다보고 선택을 했으나, 가인의 경우에는 그런 태도를 읽어낼 만한 대목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벨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려는 의지가 있었던 반면, 가인은 그렇지 않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