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인의 표식 (2)
(창세기 4:9-16)
* 너의 아우는 어디 있느냐
그러한 확신이 이제 여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살인을 저지른 자만 알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과연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습니다.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기 4:9)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평소 보였던 아벨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이지요. 여기에서 유심이 봐야 하는 것은 그냥 “아벨은 어디 있는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부각시킨 질문방식입니다. 아벨의 행방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인 가인은 알고 있으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왜 없지?”라는 질문과 상통합니다. 그것은 “그 까닭과 그 소재를 적어도 어만큼은 알고 있겠지?”라는 질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왜 안보이게 되었는지 모르시고 “가인아, 너의 아우 아벨을 빨리 좀 찾아봐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모르셔서가 아니라 가인의 입으로 직접 진실을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거짓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가인은 아우의 행방에 대해 일단 ‘모릅니다’라고 부인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주장합니다. 이 “모릅니다”는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라는 반박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벨의 운명에 대해 가인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아우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형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최대한 자기 능력 안에서 당연히 지켜줘야 합니다. 형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위험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만약 자기 능력 밖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으려고 애를 쓰겠지요. 그런데 가인은 전쳐 그렇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