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성경 ; 마태복음 24,23-27
23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시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오' 혹은 '아니, 여기 계시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25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 26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계신다' 하고 말하더라도 너희는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계신다' 하더라도 너희는 믿지 말아라. 27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에까지 번쩍이듯이, 인자가 오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들어가며 : 부활주일을 지난 주일에 지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부활의 큰 능력을 체험하면선 살아가셨습니까? 대답이 시원치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시는 한 주간이 되셨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말로만 떠들어대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그것은 교회 안에 말은 무성하지만 그 말이 이루어지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말씀은 있는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를 별로 볼 수 없으니 그 말씀은 당연히 능력이 없는 말씀이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부활이라고 많이 떠들어대기는 하는데 그 삶에서 부활의 능력을 느낄 수 없으니 어디 누가 그런 부활을 믿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믿지 않고 경험하지 못하는 부활을 어느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여러분은 이제부터 부활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혹시 경험이야 저절로 생기는거지 어떻게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느냐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려고 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찾아보고 발견하려는 태도만 갖는다면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삶의 한 가운데 경험하고 그 능력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성도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자비,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이 세상에는 참으로 믿을만한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돈이 믿을만한 힘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권력 있는 사람도 믿을만 합니다. 지식이나 인기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종교도 믿을만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종교를 갖겠지요. 종교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믿을 만한 것들 중에 예수님을 믿고 또 그의 아버지라고 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또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대답을 해보십시오. 예수님만이 유일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상투적이고 교리적인 대답 말고 정말 내 스스로 예수님을 혹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는지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우리가 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일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고 인정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낚시를 해서 잡히는 고기의 배를 갈로면 동전이 있으니 그것으로 성전세를 내라고도 하셨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니 즉시로 말라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으셨다고 하고 또 폭풍우도 말 한 마디로 잔잔케 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폭풍우가 멈추는 것을 보고는 ‘저 분이 뉘시기에 자연도 그의 말을 복종하는가?’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자연도 예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증거이니 그 증거야말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믿으시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시는 것입니까?
또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여기저기 이런 일은 처음 봤다, 그가 하나님을 힘입지 않고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등등 치유와 관련된 고백을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보이셨던 치유의 기적 때문에, 정확하게는 예수님이 예전에 치유의 기적을 보이셨다고 말하는 성서의 기록, 증인들의 증언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생각해봐야 할 일입니다.
요즘도 교회며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병고침을 받았다는 기적과 같은 고백을 종종 듣습니다. 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얻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종종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는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 사람들이야 체험이 분명하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아무런 죽을 병도 안 걸려보고 어려운 육체적 질병으로 고생한 적도 없고 더더군다나 특별한 치유의 기적을 맛본 적이 없는 우리들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으니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육체적 질병이나 고난에 대비해 그냥 보험 들어 놓는 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었던가 하고 스스로도 묻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증거를 교리적으로 대답하다보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에 십자가는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못하는 저주받은 사람의 상징이었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심지어는 한 번에 2,000명이 한꺼번에 골고다 언덕이며 언덕길에 매달려 사형 당해 피비린내, 시체 썩는 냄새가 온 예루살렘을 휘감았다는 역사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고 예수님은 만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거죠? 십자가형은 일반 파렴치한 죄를 지은 이들이나 큰 중죄를 지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형벌이 아니라 정치범들에게 행하는 사형입니다. 정치범이란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하다가 잡혀서 일제에 의해 처형 당한 유관군 누나나 뭐 그런 사람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십자가형을 받은 이들, 그 많은 조국과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 중에 왜 유독 예수님만 톡특하고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교인도 아니면서 왜 예수님을 주라고, 그리스도요, 메시야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돌프 히틀러, 그의 손에 죽어간 유태인이 600만 명이라고 합니다. 히틀러는 참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이 조만간 경매에 나온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두 번이나 낙방을 하고는 군대에 갔다고 합니다. 만약 히틀러가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더 미대에 응시를 했었더라면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틀러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한번 예수님을 적용해 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다 후대의 해석이나 상징이었다면, 나쁘게 말해서 거짓말이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기적을 행하거나 병자를 치유했다거나 하는 것이 비슷한 일은 있지만 의사가 치유하듯이 그런 것이 아니고 육체적인 것도 아니며 그 당시에는 나은 줄 알았는데 며칠 지나자 똑같이 되었다거나 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었다고 해도 여전히 예수님의 신성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이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예수님은 오히려 말세에 큰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주의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자신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니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기적이나 치유의 은사나 뭐 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짜 그리스도, 자칭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람을 유혹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소지가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기적과 같은 것을 인정하지도 않으셨고 그런 기적이나 놀라운 일, 기적 같은 치유에 의존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믿고 인정해주는 것을 경계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고쳐준 병자들에게도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셧다고 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기적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오히려 사람을 미혹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고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 11:8에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왜 광야로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갔느냐, 부드럽고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왔느냐,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다. 바로 예언자를 보러 왔다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광에 가서 왕을 찾으면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와서 기적을 보고 싶다고 하고 표적을 보고 싶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기적이나 표적, 신가하고 놀라운 일, 어떤 특별한 일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에 대한 큰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27절이 해결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는 번개가 번쩍하듯이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척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는 그분이 누구와 함께 있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면 단번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후배 결혼식에 갔다왔습니다. 후배가 하는 말이 아내를 보는 순간에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그래서 결국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그리스도는 첫눈에 알아보는 것이겠지요.
오늘날 교회 건물은 커지고 수만 명씩 동원할 능력이 있는 목사들도 많은데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알아보듯이 첫눈에 알아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중후한 목소리로 뭔가 있어 보이는 큰 교회 목사들은 많이 있는데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기꺼이 따라 가는 목사들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으니 어쩌면 예수님이 말세에 경고했던 그런 가짜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닐까 걱정을 하게 됩니다.
기적이 아니라 그분의 삶으로 첫눈에 알아보는 것입니다. 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인생입니다. 놀라운 어떤 사건이 아니라 그분이 걸어온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번개처럼 번쩍이며 우리를 깨닫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자 증거이고 힘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굴욕당하는 이들, 힘도 없고 빽도 없는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고 또 그들의 억울함을 덜어주는 길을 걸어가신 삶을 통해 그분의 그리스도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희생과 헌신이,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을 믿고 우리도 그 길을 기꺼이 따라갈 때에 우리가 바로 믿고 바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길일 것입니다.
나가며 :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무슨 특별한 경험, 특별한 기적, 특별한 어떤 일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믿음의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을 그런 신앙을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던 방식은 예수님이 가장 우려하고 염려했던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적이나 놀라운 일, 특별한 일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진실한 섬김으로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반석을 딛고 서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