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조회 수 76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잘 했다, 힘을 내라!


성경 ; 마태복음 9,20-22

20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 여자는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텐데!" 했던 것이다. 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들어가며 : 만물이 생명의 기운을 펼칩니다. 녹색이 완연해졌고 새순들이 어느덧 푸르른 잎사귀로 바뀌었습니다. 봄을 더욱 깊게 하는 봄비도 촉촉하게 내렸습니다. 자연은 이제 완전히 되살아나 부활의 기운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네 인생살이는 더욱 팍팍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입니다. 경기가 조금 나아진다고 뉴스는 조심스럽게 전망을 해보지만 실생활은 여전히 힘겹고 어렵습니다. 실업률은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고 물가상승으로 100만원을 더 지불했다는 뉴스도 있더군요. 그 어느 것 하나 우리를 활기차게 하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모든 절망과 포기, 좌절에서 건지시고 일으키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참된 아버지, 참된 어머니는 힘들고 어려울 때에 더욱 깊고 절절한 사랑과 책임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 이 자리의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 그리고 혈루증이라는 병을 앓는 사람은 과연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요? 여자는 이미 수차례 언급한대로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여자는 제1 상위층이지만 예수님 당시 중동에서 여자는 남자의 재산 목록 가운데 하나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사랑을 다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요셉 같은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 시대적 악습에 길들지 않은 선구적인 사람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병에 걸렸다는 것 역시 낙인이었습니다. 병에 걸렸다는 것은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원인이 죄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은 죄의 결과 혹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생적인 이유는 물론 종교적인 이유로까지 기피하고 격리하였습니다. 특히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거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병이 장병, 중병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아프고 힘든데 돈도 없어 병이 깊어지는 마당에 죄인이라고까지 낙인을 찍으니 이중삼중의 고통 가운데 놓여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혈루증은 어떻습니까? 혈루증은 우리가 알기에 피가 응고되지 않아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병이다. 수술도 받기 쉽지 않은 그런 병이다. 그러나 사실 이 여자가 앓고 있는 혈루증은 혈액응고와 관련이 있는 병이 아니라 성기에서 피를 흘리는 하혈병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여성의 월경을 부정하게 여겼다. 그래서 월경하는 여인과 성관계는 물론이고 몸이 닿기만 해도 몸이 닿은 사람까지 부정해진다고 규정하였다. 성적인 것을 금기시하는 고대종교사회의 풍토에서 성기에서 피가 흐르는 병은 그 사람이 그렇지 않아도 죄인인데 더욱 추악한 죄를 지은 죄인임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달나라에도 가는 과학적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오해는 있습니다. 병에 걸리는 것이 나름대로 위생적이지 못하거나 생활이 건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오는 것이라는 오해 말입니다. 신부전에 걸려 죽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에게 어느날 물었습니다. 넌 왜 그런 병에 걸렸나고. 그랬더니 그 친구는 재수 없어 걸렸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감기가 무슨 이유 있어야 걸리냐는 겁니다. 사실 병이란게 그런거 아닙니까! 폐암이라고 다 흡연자가 아니고 에이즈라고 해서 다 동성연애자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이 여인은 사회적인 약자였고 관심은커녕 보호도 받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며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심각한 오해와 편견에 따라 인간적인 대접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잉여인간으로써의 대접을 받는 귀찮고 기피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기운 내라, 잘 했다, 네 믿음이 옳았다, 네가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상은 가장 위로가 필요하고 가장 격려가 필요하며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가장 필요했던 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사람 대접 해주는 것도 상상 못할 일인데 그런 사람에게 ‘잘 했다고, 옳았다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한 쇼킹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립서비스의 달인이라거나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 목사, 장로, 권사 등등 하는 사람들이 립서비스의 달인들입니다. 앞에서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듣기 좋은 말, 은혜로운 말을 합니다. 그것이 거의 강박증과 같이 그런 외적인 경건과 친절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혹은 속이 통하는 이들끼리는 이러쿵 저러쿵, 누가 어쨌네 저쨌네 하면서 말을 만들어 그런 뒷담화로 인해 상처 받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잘 하는 사람들인데 순전히 립서비스 수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닙니다. 욕 먹을 만한 놈들에게는 독설도 마다지 않으십니다. 욕도 잘 하신 분이었나봅니다. 뱀 같은 새끼들, 개 같은 새끼들, 여우 같은 새끼, 벼락 맞을 놈들 등등 분노를 담은 말씀을 적지 않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와 종교의 지도자라는 이들에게는 독사 새끼들이니, 개새끼니 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존경과 칭찬을 받고 섬김을 받아야 마땅한 지도자들에게는 갖은 욕설과 비판을 하신 분이었지만 가장 낮은 자, 고통 받고 소외 당하며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기꺼이 부드럽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만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사실 많은 부분에서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성도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보다는 하나님이 너를 위로하시고 복 주시고 돌봐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인지 명령적인 설교를 하는 교회는 교인이 별로 없지만 위로하고 격려하며 복 받으라고 하는 교회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위로와 격려의 설교를 좀 하라는 압력을 은근히 받게 됩니다. 하긴 교회 다니는 사람만이 아니라 현대인은 누구나 다 위로 받고 격려 받고 싶어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라면 더할 나위 없이 대단히 큰 선물입니다. 그래서인지 비신자라 해도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인사에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위로라는 것이 쉽지 않고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기도하고 나니까 마음이 확 밝아지고 승리감이 생기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밤을 새서 기도하다보니 눈물이 쏟아지고 눈물의 회개기도를 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것도 저는 솔직히 심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라는 것은 무슨 특별한 체험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그리고 살 수 있는 삶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지도 모르겠지만 성도들이야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는 어쩌다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것이라지만 성도들의 위로야 자주 듣고 힘을 얻지 못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실상 성도들 간에 나누는 위로와 격려는 별로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위로는 듣지 못한다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야 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긍정적으로 안아주지 못합니까?

사실 우리 교회는 위로와 격려가 부족합니다. ‘잘 했습니다. 좋습니다. 대단합니다. 맞습니다.’ 이런 위로의 말, 격려의 말, 힘을 주는 말이 너무 부족합니다. 고백하기는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잘했다고 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했냐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당신의 생각이) 좋다고 하기보다는 ‘그것보다는’ 이라고 댓구를 하는 적이 더 많습니다. 맞습니다는 말보다는 ‘아니’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하여 위로가 아니라 깎아내리고 칭찬보다는 우려를, 위로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언어습관이나 생활습관은 결코 예수님을 따르는 이의 언어생활태도가 아니고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나가며 : 그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진심을 담아 위로하고 긍정하고 격려하며 힘을 주는 말은 우리교회에 꼭 필요한 사고방식입니다. 사회적 부조리에 강력하게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위 섬김 받는 지도자들이 저지르는 망동에는 격렬하게 비판하고 욕설도 기꺼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마땅히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써 예수님이 마땅히 하셨을만한 그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위로의 말, 격려의 말, 그리고 이왕이면 긍정의 말을 더 많이 함으로써 이 땅의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새로운 삶을 만들 전기를 개척해나가도록 돕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15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 마태복음 24:23-27 좋은만남 2009.04.20 1122
714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4/26) 좋은만남 2009.04.25 660
» 잘 했다, 힘을 내라! / 마태복음 9:20-22 좋은만남 2009.05.02 769
712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3) 좋은만남 2009.05.03 572
711 어린이 같지 않으면 / 마가복음 10:13-16 file 좋은만남 2009.05.03 1077
710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10) 좋은만남 2009.05.12 752
709 어버이께 감사하라 / 마가복음 7:10-13 좋은만남 2009.05.13 644
708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17) 좋은만남 2009.05.16 637
707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24) 좋은만남 2009.05.26 570
706 웨슬리정신, 감리교회 정신 / 마태복음 22:37-40 좋은만남 2009.05.30 1084
705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31) 좋은만남 2009.05.31 671
704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6/7) 좋은만남 2009.06.07 602
703 성령충만하십시오 - 거룩한 분노 / 사무엘상 11:5-7 좋은만남 2009.06.10 891
702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6/14) 좋은만남 2009.06.16 68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6 Next
/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