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주현 후 제2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해주심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시는 한 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3. 하나님의 은혜와 교우들의 배려로 '좋은만남 좋은여행 2018'을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협조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4. 15(월)~17일(수)에 진관교회에서 은평동지방 등급대사경회를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석하십시오. 오전 9시에 시작합니다.
5. 기부금영수증이 필요하신 분은 신청해 주십시오.
[1월 생일축하] 채보란 청년(9일), 양연화 집사님(31일/음12.15), 축하합니다.
■ 목회서신
지난 한 주간을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월요일부터 지방 교역자회의가 열렸습니다. 함께나누는세상에서 기부금영수증 발급과 소식지 제작을 위한 작업도 서둘러 해야 했고 대북단체 연합기관에서도 회의가 열려 참석해야 했습니다. 강화에 존경하는 선배님이 부친상을 당하셔서 의왕에 조문도 다녀오고 주말에는 은평동지방에서 장로 진급과정을 위한 교육에서 강연도 두 시간 했습니다. 정말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난 주간에 교우들과 함께 대만 가오슝에 여행을 다녀온 것이 그저 아득한 꿈같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제 주일준비를 하기 위해 교회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으니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생각해보면 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무탈하고 즐겁게 잘 다녀왔기에 한 주간을 정신없이 일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 감사하고 은혜입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듯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 대만!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느끼는 점은 인간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가치들, 그리고 그들이 갈망하는 삶도 우리도 원하고 있고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을 사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고 사랑함을 고백한다.
임미화 집사님이 페이스북에 쓰신 글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확인하고 온 여행, 그래서 이 여행이 더욱 값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는 모습들이야 이렇게 저렇게 다르지만 대만 사람들 역시 주어진 생명에 감사하며 매순간을 소중하게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허울 때문에 선을 긋고 차별하며 대결하고 경쟁하는 일에만 몰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모든 인류는 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세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경쟁하고 힘을 얻어 군림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선 안 됩니다. 우리는 어느 국가와 민족이라는 소속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 좋은여행 2018
“아~ 대관람차는 왜 탔을까?” / 함옥분 장로


다른 사람들은 해외 가족여행을 쉽게 가는 줄 알았다.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걸 요즘에야 알았다. 많지도 않은 우리 네 식구가 모처럼 길어야 3박의 해외여행을 계획했지만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아픔… 글쎄 아픔까지는 아닐지라도~
하지만 교회는 뭉쳤다. 26명의 식구가 시간도, 경제도, 마음도, 뜻도! 그리고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고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뭉쳐서 드디어 출발, 가오슝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으로 간 곳이 불광사였다. 왜 불광사를 가냐고 웃으면서 농담들을 했지만 막상 가서 보니 그 규모는 대단했다. 그 이후로 이어진 이틀간의 일정, 가는 곳 마다 즐겁고 재미있었다. 가이드로 만난 사람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살짝 걱정했던 음식도 별 거부감 없이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유람선을 타면서 본 가오슝의 야경이 나에겐 최고였다! 아~ 대관람차는 왜 탔을까? 지금도 아찔하다.
비록 짧은 일정이었고 조종사의 과속 탓인지 비행기가 계속 춤을 추면서 왔지만 작은 사고 하나 없이 모두가 무사히 도착한 것에 감사한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세계지도에 대만을 찍고 다음엔 어디를 찍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아직은 가오슝의 야경과 우육면의 절묘한 맛을 간직하고 싶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씨가 남영동에서 물고문으로 사망"
박종철씨는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어 징역을 선고받고 출소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서울대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어, 수배 받고 있었던 선배 박종운의 은신처를 자백하라는 경찰의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끝에 다음날인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돼 당시 민정당 대선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요즘 영화 '1987'의 흥행소식과 당시 박종철 추모기도회를 주도한 변호사 중 하나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이 영화를 관람하였다는 뉴스가 들려옵니다. 당시 경찰이 박종철을 고문하여 잡으려 했던 박종운은 이후 한나라당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였습니다. 신창언 수사지휘 검사는 이후 민자당(현 자유한국당의 전신)의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냈으며 사건 은폐 축소에 가담하였던 담당 검사 박상옥은 박근혜 정권에서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 또다른 담당 검사였던 안상수는 한나라당 당대표를 역임했으며, 현 창원시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 감리교는 무엇을 믿는가?
이찬석 지음 KMC (2014)
제2장
하나님Ⅰ (1)
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며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의 1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을 우주 만물의 창조자, 섭리자, 주관자로 고백하며,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서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1조의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에 대한 은유(metaphor)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2장에서 1조의 전반부 내용인 창조자 하나님,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고, 2장에서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유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창조주 하나님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고백 중 하나이다. 성경의 첫 번째 문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이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임을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신조인 사도신경의 첫 번째 고백도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한다. 성경과 사도신경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에 대한 최우선적인 신앙고백은 ‘하나님은 창조주시다’라는 신앙이다.
다윈(Erasmus Darwin)의 ‘진화론’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창조’라는 말을 보고 들을 때마다 ‘진화’가 자연적으로 떠오른다. 현대인들은 정규학교의 교과서와 수업을 통하여 진화론을 배우며 우주의 기원은 창조가 아니라 진화라는 점을 교육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이 세계와 우주가 시작되었음을 반복적으로 읽고 듣고 고백한다.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가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와 같이 현대인들은 ‘창조냐? 진화냐?’라는 물음을 계속적으로 던지면서 고민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창조와 진화를 양재택일(either/or)의 문제로 보지 않고 양자선택(both/and)의 문제로 보면서 ‘창조적 진화’라는 개념을 통하여 창조와 진화를 통합/통전하려고 한다.
한 편의 시(詩)를 읽는 사람이 시를 읽기 전에 분명하게 가져야만 하는 전제는 ‘시’를 읽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은 역사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있다는 점을 전제해야만 한다. 만약에 역사책을 읽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소설을 읽어 간다면 소설은 사실성이 전혀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과학책을 읽고 있다는 전제로 시를 읽어간다면 시의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다. 한편의 시는 시로 읽어 가야 하고, 소설은 소설로 읽어 가야 한다. 소설에는 소설의 문법이, 시에는 시의 문법이, 역사책에는 역사의 문법이 존재한다. 역사책에 시의 문법을 적용하거나, 시에 역사책의 문법을 적용한다면 본래적인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 ‘창조냐? 진화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창조’는 신앙의 문법으로 읽어 가야 하고, ‘진화’는 생물학적 문법으로 읽어 가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적 문법으로 읽어 가지 않고 생물학적 문법으로 읽어 간다면 본래적인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적 문법으로 읽어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만 세 가지 의미를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하나님을 창조주이고,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피조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것(타자)에 의하여 만들어지거나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계속)
■ 영화묵상 - 이관택 목사

“나도 오늘 ‘자전거’를 빼앗겼다”
자전거 도둑(The Bicycle Thief) |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작품 | 96분, 이탈리아, 1948년,
* 스포일러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 노출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1001』 중 하나이자 영화사를 공부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화가 바로 오늘 소개할 <자전거 도둑>이다. 유명한 만큼 이 정도는 봐줘야 할 것 같아 호기롭게 도전하지만,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멋진 배우가 등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쫄깃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혹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담담하고 거칠다.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의 1948년작 영화인 <자전거 도둑>은 당시 새로운 영화 운동이었던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네오리얼리즘’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여기에는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아래에서 전쟁에 찬동하고 정권의 선전도구 역할에 머물렀던 당시 ‘이탈리아 영화인’들의 반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전쟁이 남긴 비극을 극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면서 당시의 황폐한 사회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특징이다. 이는 과거 전체주의와 국가주의로 인해 전쟁까지 불사했던 자신들의 야만성에 대한 성찰이자, 피폐하고 불의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하여 끝없이 관심하고,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과 변화를 열망하는 하나의 문화운동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패배주의와 가난, 높은 실업률로 인해 사회 전체가 피폐해지고 모든 사회 시스템이 뒤엉킨 세상이다.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제가 되어버린 이 삭막한 시대를 배경으로, 평범한 가장 ‘안토니오’와 그의 가족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일자리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만큼 안토니오도 오랜 실직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벽에 전단지 붙이는 일자리를 구하게 되는데,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자전거’였다. 안토니오가 자전거를 구입할 돈이 없어 전전긍긍 할 때, 그의 아내가 결혼 예물이었던 침대 시트를 전당포에 잡히고 받은 돈으로 결국 자전거를 구해 온다. 안토니오는 작은 희망에 부풀어 출근하기 시작했지만, 출근 이틀째 되던 날 누군가 안토니오의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는 일이 벌이지고, 이후 영화는 도둑맞은 자전거를 되찾기 위한 안토니오와 그의 아들 부르노의 눈물 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자전거’는 안토니오와 그의 가족에게 있어서 생존을 위한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영화의 흑백 화면은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안토니오의 참담한 모습을 비춘다. 희망을 도둑맞은 그의 모습은 서글프고, 그가 마주한 현실은 냉정하기만 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거대한 건물 사이를 오가며 정신없이 자전거를 찾아다니는 안토니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삶의 마지막 끈을 도둑맞고 사방의 벽으로 둘러싸인 개인의 고립감을 극대화시킨다. 군중과 빗줄기에 의해 포위된 것 같은 화면구성은 안토니오의 비극적 상황과 겹쳐지면서 보는 이의 심장을 조여 온다.
백주대낮에 자전거를 도둑맞은 안토니오는 백방으로 도움을 청하지만 경찰과 공권력도, 그 거리를 잘 아는 친구들도, 심지어 종교인조차도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자전거를 되찾는 것은 영영 불가능해 보인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결국 안토니오는 자전거를 찾았을까? 그랬다면 참으로 영화 같은 해피엔딩이었겠으나, 이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수식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안토니오는 기어코 자전거 도둑을 찾아내지만 자전거는 사라지고 없다. 희망을 모두 상실한 그는 결국 다른 이의 자전거를 훔친다! 이제 그 자신이 ‘자전거 도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곧 붙잡히고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게 된다. 차라리 허구의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더욱 씁쓸한 결말이다.
영화는 1948년의 이탈리아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에는 크게 두 가지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자전거를 도둑맞은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 도둑이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다. 삶의 희망과 생존의 유일한 수단을 빼앗겨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도둑맞은 안토니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땅에서는 어떤가. 벌써 20년 전 일이지만 필자의 학창시절에 불어 닥친 IMF라는 광풍은 필자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희망 가득한 눈빛을 빼앗아갔고 수많은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 여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 뿐인가. 문자로 해고를 통보받고 수시로 일터에서 쫓겨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취업난에 시달리며 부엌도 없는 작은 방에서 지내야만 하는 청년들, 차별적 시선과 위험한 일상에 노출되어 있는 장애인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수단을 수차례 도둑맞은 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으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은 마땅히 찾아야 할 자신의 자전거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자전거를 훔치도록’ 요구받는다.
안토니오의 자전거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자전거를 보장해줄 시스템도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결국 전 사회가, 역사적 상황이, 지역공동체 모두가, 심지어 종교인들까지 공모하여 안토니오를 자전거 도둑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수많은 안토니오들이 이 사회의 강요에 의해 자전거 도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았는가?’ 이것이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네오리얼리즘’은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똑똑히 보라!”고 종용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 당시의 감독들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야기로 점철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시대의 부조리함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전의 영화들에 저항하기 위해 사실주의라는 표현방식을 택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무겁고 거칠고 힘들지만, 그러한 과정 없이는 어떤 대안도 혹은 성장도 불가능하다. 신앙생활의 첫걸음도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의 신앙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거나, 긍정일변도로 점철되어 있을 때가 많다. 신앙생활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믿음과 실천이 분리되고 시대의 흐름과 단절된 신앙을 갖는 것은 본질을 망각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조금 허전하고 가볍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 이유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종교인들처럼 자전거를 도둑맞은 이 시대의 안토니오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애굽의 압제 속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이, 갈릴리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그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괜히 시작부터 낯선 용어가 등장하여 당황스러웠다면 ‘네오리얼리즘’이란 용어는 잊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성찰하며, 고난 받는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관심하고자 했던 이 영화운동의 정신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 자신을 성찰하고, 이웃을 향해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는 것이니까.
다행히 이 영화는 마냥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시종일관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천진난만하게 헤벌쭉 웃는 안토니오의 아들 부르노를 등장시킴으로써 우리가 비극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 왔는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서로의 손을 잡고 암담한 내일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부자의 뒷모습이라니, 사뭇 낭만적이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연출된 따뜻함은 그럴싸할지 몰라도 자전거가 없는 내일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전거를 도둑맞은 이의 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의 자전거를 훔쳐야 살 수 있다고 속삭이는 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 같이 보면 좋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작품, 116분, 이탈리아, 1997년.
<인생은 아름다워>는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지만 코메디언 출신인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만큼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아카데미, 칸 등 전 세계의 주요 영화제를 휩쓸었던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비극적 상황에 처한 아버지와 아들, 그러나 서로의 온기로 그 상황을 버텨내는 모습에서 두 영화는 사뭇 닮아있다. 사실적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현실의 비극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자전거도둑>,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력으로 현실의 비극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인생은 아름다워>. 두 영화가 모두 훌륭하지만 우리는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기한 ‘아버지’의 익살스런 모습과 영화의 판타지적 면모를 보며 위로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지? 오늘 소개한 <자전거 도둑>과 비교해서 보면 두 영화의 매력포인트가 더욱 잘 드러날 것이다.
* 감리교 교단지 <기독교세계> 2018년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남과 북이 함께 자리를 마주하였습니다. 서로를 비난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관계가 악화되었던 지난 9년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 함께 손 맞잡고 나아가야 할 길이 멉니다.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 평화를 위한 이 길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