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01.27 15:35

2018년 1월 28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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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주현 후 제4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해주심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시는 한 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공동설교를 해주신 한효균 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2. 오늘 오후에는 우리 지방 김병훈 감리사님을 모시고 좋은만남 구역회를 하겠습니다. 구역회원은 따로 없으니 참석을 원하시는 분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3. 다음주일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4. 2월 둘째 주일(11일) 오후에는 성서대학 계절학기를 하겠습니다. 학기 중 성서대학에 참석하신 분들과 참석하지 못한 분들 모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5. 박성중 목사님 어머님이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십니다. 환우들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6. 함희옥 집사님이 지난 24일(목) 외손자를 보셨습니다. 생명 얻은 아기의 인생을 축복하며 축하합니다.
 
■ 좋은여행 2018
“더 많이 이야기 나누었더라면...”  | 한효균 부장
2박3일의 짧은 일정 탓에, 많은 여행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고 떠난 대만 가오슝 여행.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4박5일 정도의 일정을 소화하고 온 듯한 꽉 찬 느낌이었다.
여행지로 방문한 곳들은 강한 인상을 남긴 곳은 많지 않았지만, 그때그때 함께한 교우들의 인상은 강하게 남은 여행이었다. 교회에서만 만나는 교우들과 여행지에서 만나는 교우들은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어 호기심과 기대가 크다. 많은 분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본 듯 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분들을 만나서 가까워지는 좋은 계기였다. 다만, 여행지에서 제한적인 분들과의 동행으로 인해 더 많은 분들과 여행지에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방을 바꾸면서라도 더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여행지에서… 서로 아름다운 배려를 보여주며 함께 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알찬 여행에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 오호숙 권사
너무 알찬 여행이어서 좋았다. 언젠가 교회에서 여행을 가는 꿈을 꾸었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현실로 가게 되었다. 전에 형제들과 모임에서 같이 간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26명이 움직이니 좋을 거라고 생각하며 공항에 도착하니 모두 다 모여 움직이는 것을 보니 대단했다. 가오슝에 도착해서 만난 가이드가 청년이라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다음날 아침, 장로님과 공원에 산책 나가서 돌다 대만 아줌마들이 있어서 보니, 음악이 나오는데 아침 운동을 나오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짝이 맞지 않아서 장로님이 가시니 손을 내밀어 함께 차차차 춤을 추는 행운이 있어 너무 즐거웠다. 첫 날 발 마사지한 것이 좋았고 둘째 날 대관람차는 스릴 있었다. 음식도 거부감도 없고, 또 대형빙수도 먹고, 배도 여러 번 타고, 너무 알찬 여행이어서 감사했습니다.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다녀와서 또 감사했습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606년 1월 31일    "화약음모사건의 주모자 가이포크스가 처형되다"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은 영국 왕 제임스 1세가 가톨릭을 탄압하고 성공회(聖公會, Anglican Church)를 우대하는 정책을 펴자 이에 반발한 가톨릭교도 중 과격파가 1605년 11월 5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개원식에 참석하는 국왕을 폭살하려던 계획을 말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자인 가이 포크스가 1606년 1월 31일에 처형되었다. 가톨릭계인 제임스 1세가 왕이 되자 가톨릭과 청교도는 종교개혁이 후퇴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질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의외로 국교인 성공회를 옹호하고 가톨릭 교도와 청교도들에게 성공회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가톨릭 과격파 로버트 케이츠비는 워스트민스터 궁전 개원식 때 궁전을 폭파시켜 성공회 회원들과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세력을 모았고 가이 포크스는 폭파를 실행하는 역할을 맡고 가담하였다. 이들은 왕국 지하실에 화약통을 몰래 옮겨 놓고 거사일을 기다렸으나 가톨릭 교도도 폭발에 희생될 것을 우려한 누설자가 있어 결국 체포되어 고문과 투옥, 살해와 사형을 당하거나 자수 투항하였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가면 사나이는 가이 포크스의 이미지를 차용하였다.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 감리교는 무엇을 믿는가?
이찬석 지음 KMC (2014)
 
제2장 
하나님Ⅰ (3)
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며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1조의 고백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우주와 세계를 당신의 뜻과 계획 안에서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사역)은 세계를 창조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우주 만물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하나님의 일이며, 우주를 다스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다. 전통적으로 ‘일’은 죄에 대한 징벌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함으로 인류에 ‘일’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고 보면서 일(노동)을 죄에 대한 징벌로 해석한다. 일(노동)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 모순을 일으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한복음 5:17) 여기에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분명히 하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일(노동)을 죄에 대한 징벌로 해석한다면, ‘일하시는 하나님’과 모순이 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그들에게 이미 일이 주어져 있었다. 동산지기로서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일이 아담과 하와의 일이었다. 즉, 그들이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일이 주어져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도 일로 읽혀야 한다. ‘일(노동)’은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닌 창조의 질서이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해야 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현재에는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일하시면서 창조활동을 계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은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으로 다스리지 않고 당신의 뜻과 계획 안에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신다. 즉, 섭리하시면서 주관하신다. ‘섭리’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 중에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의미는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이다. 결국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섭리’ 안에서 주관하신다.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섭리에 근거하여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주관은 하나님의 섭리를 구체화(현실화)한다. 그러므로 ‘섭리’는 ‘주관’의 내적인 근거이고, ‘주관’은 ‘섭리’의 외적인 근거이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처음의 창조, 계속적인 창조, 마지막 창조, 이 세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해야 한다. 처음 창조는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천지와 식물과 동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이 처음 창조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인 창조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말씀하시듯 성부 하나님은 현재에도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창조활동이다. 하나님의 창조활동은 처음 창조로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계속적인 창조’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창조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종말적인 창조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마지막 창조이다. 그러므로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계속적인 창조‘의 활동이라 할 수 있고 ”셥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목표와 완성은 ’마지막 창조‘와 연관성을 갖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세계와 역사를 내버려 두시지 않고 섭리 안에서 주관하신다. 그러나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물음은 ’악의 문제‘이다. 진, 선, 미와 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물음이다. 이 물음은 자유의지와 연관하여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다스리시지만 피조물들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을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하나의 기계와 같이 창조하시지 않았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자유의지가 있고, 하나님의 이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면서 세계를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선(善)을 선택한 것과 악(惡)을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피조물)의 몫이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악에 대한 기원과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면서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고, 이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다. 
 
■ 음악묵상 - 이관택 목사20180128_002.JPG

 

 

”다시, CCM이 듣고 싶어졌다 ”

<브라운 워십>이 말하는 ‘잔치의 조건’에 경청하며
 
# CCM을 끊었다.
교회는 지루한 공간이었다. 모태신앙을 가진 채 살아온 대다수 청소년이 그렇듯 나 역시도 별다른 체험과 깨달음 없이 교회학교를 오가는 신세였다. 그런 내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발붙일 수 있었던 계기가 있다면 8할은 신앙심 강한 어머니의 회초리 때문이요, 나머지 2할은 사춘기의 흔들리는 영혼을 굳건히 붙잡아줬던 ‘CCM’ 덕분이리라. 음악을 좋아했던 내게 교회학교의 ‘찬양시간’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소리엘과 김수지, 그리고 소향이 대세를 이루던 그 때, 찬양은 모호했던 하나님과 나를 이어주는 실낱같은 기쁨이었다. 지루했던 교회가 생동감을 갖게 된 것과 ‘못해’신앙이던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지고 신학교까지 진학한 것은 그야말로 ‘찬양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찬양에 대한 생각은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영혼구원의 레토릭만을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의구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이 스스로 인간이 될 만큼 온몸을 던져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 기독교 복음인데, 도대체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서 애끓은 복음의 몸짓을 발견할 수 없었고, 교회의 찬양 속에서 신앙의 진중함을 경험할 수 없었다. 천편일률적인 찬양의 가사들은 저마다 신에 대한 숭배사상과 예수의 피를 갈구하는 말들만 단순 반복하고 있었다. <디사이플스>와 <힐송> 등의 예배팀이 각광 받던 시절, 후크송을 방불케 할 정도로 중독성 강한 찬양에 맞춰 저마다 손을 들고 방방 뛰는 것이 예배의 흔한 풍경이라니... 내게는 그런 찬양의 풍경이 자기연민에 심취한 개인들의 몸부림으로만 느껴졌다. 템포도 빨라지고 중독성도 강해졌지만 지.루.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거나 지나치게 의미심장했던 찬양들이 너무나 지겨웠다. 결국 나는 CCM을 끊었다. 
 
# <브라운 워십>의 기도소리
 다시 CCM 음악이 귀에 들린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니 노랫소리보다는 기도소리에 귀가 열렸다고 해야 정확하다. 강추한다는 지인의 페이스북 글을 보고 별 기대 없이 음반을 플레이했는데, 느닷없이 등장하는 예배인도자의 낮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마음 깊숙한 곳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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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월호 희생자와 미수습자, 생존자 그리고 그 가족들과 연대하는 이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또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기 위해 희생당하신 분들과 지금도 애쓰고 있는 모든 분들을 기억합니다. 길 위에서 여전히 몸부림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해고된 노동자들의 가족들을 기억합니다. 핵발전소와 송전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우리의 이웃들을 기억하겠습니다. 폭력과 혐오와 차별로 고통 받는 우리의 벗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걸어가는 두레방의 친구들과 나사로의 동생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몫을 기억하며 하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 땅의 새 내일을 열기까지 오늘 함께 노래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브라운 워십 <Overture To Feast> 중 
 
 지난 11월 발매한 <브라운 워십>의 정규2집 ‘잔치(FEAST)’의 오프닝곡 <Overture To Feast>에 담겨있는 기도소리이다. 충격적이었다. 4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찬양인도자의 입을 통해 이토록 구체적이고 명확한 상황들을 제시하며 기도하는 목소리가 담긴 음원을 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순되고 완악한 세상 가운데서 고난 받고 있는 이웃들을 하나하나 명기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겠다고 선언하는 <브라운 워십>의 오프닝. 이 짧지만 호소력 있는 기도의 잔향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음악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끔 나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 <Overture To Feast> - 잔치를 위한 조건
 ‘잔치(feast)’라는 제목을 가진 이 앨범의 첫 번째 곡 <Overture To Feast>에 좀 더 주목해보자. 한국어로 번역하면 ‘잔치를 위한 서곡’이지만 내게는 ‘잔치를 위한 전제’ 또는 ‘잔치를 위한 조건’으로 읽혔다. 아마도 곡의 이름을 영어명으로 명기한 데에는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열어두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브라운 워십>이 이야기하는 ‘잔치를 위한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이 곡은 총 4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번째 파트는 위에서 언급한 인도자의 기도이다. 여기서 잔치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을 알 수 있다.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이웃들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헤아려야 한다는 것. 
 기도를 마치면 곧바로 2번째 파트인 현악연주로 이어지는데 찬송가 478장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이 연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마도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이어지는 멜로디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적극적으로 찬미하는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과 ‘아름다운 세상’이 공존하는 모순된 아이러니를 슬프도록 아름다운 짧은 현악연주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기쁨의 잔치가 되어야 하지만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미묘함. 잔치를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이 미묘하고 모순된 상황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3번째 파트는 이 곡의 메인 테마라고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 보컬이 찬송가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를 애절하게 읊조리는데, 이 찬송가가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찬송가 515장의 배경은 다름 아닌 1950년 한국전쟁이다. 당시 갑작스러운 전쟁에 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족을 잃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절망과 공포가 땅을 뒤덮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죽음과 상처뿐이었다.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1절)가 들려왔으며, ‘생명수는 말라’(2절)버린 어두운 시절이었다.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며 읍소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이 찬송시의 작사가인 ‘석진영’이다. 석진영 선생은 이 시를 쓸 1952년 당시 26세의 젊은 교사였다. 울산중학교 국어교사였던 석진영은 자신이 마주한 어두운 세상을 직시하고, 그 아픔을 글로 옮겼다. 같은 아픔을 겪고 절망에 빠져있는 동포와 믿는 이들을 향해 ‘환난 중에 있는 땅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권면했고, 신앙인들의 책임적 결단과 행동을 촉구하였다.(‘믿는 자여 어이할꼬’) 잔치를 위한 세 번째 조건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어떠한 절망 가운데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신앙인들의 변화를 위한 다짐과 결단일 것이다.
 마지막 4번째 파트는 <브라운 워십>의 리더인 이승호가 직접 작곡한 부분이다. ‘용서하소서’라는 회개의 고백을 반복적으로 노래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마지막 잔치의 조건이 무엇인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회개와 성찰이야 말로 잔치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조건이 아닐까.
 
# <브라운 워십>이 서 있는 자리
 블랙가스펠 스타일의 편곡과 뛰어난 음악성을 기반으로 한 <브라운 워십>은 이미 2009년에 첫 번째 앨범을 발매한 바 있다. 8년 만에 나온 이번 정규2집 앨범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트랙리스트의 절반 가까이를 찬송가와 오래된 복음성가들이 차지하고 있는 점, 그리고 블랙가스펠 특유의 소울풀한 보컬과 재지한 악기구성이 그렇다. 
 하지만 1집 때와 완전히 달라진 점이 있었느니 그것은 바로 <브라운 워십>의 음악이 발 딛고 서 있는 삶의 자리일 것이다. 수년전부터 교회를 벗어나 기지촌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의 곁에서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눈에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고 했던가. 달라진 풍경을 바라보는 <브라운 워십>은 여전히 같은 스타일, 같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뭔가 더욱 풍성하고 생명력 있는 에너지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자칫 기존 찬양에서 힘없는 미사여구처럼 불려지는 ‘사랑’, 
‘정의’, ‘평화’, ‘진리’, ‘생명’이라는 단어들이 이 앨범에서 유독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구체성과 명확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익숙한 찬양의 한 마디 가사도 ‘관성대로 내뱉지 않겠다!’ 이번 앨범을 듣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브라운 워십>의 이러한 ‘태도’였다. 
 ‘태도’야 말로 이번 앨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신앙을 ‘잔치’에 비유하면서 죽음과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 현실의 아픔과 모순을 담아내는 ‘찬양’을 하고자 했던 <브라운 워십>의 태도는 비단 찬양사역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의 지향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 다시, CCM이 듣고 싶어졌다
 <브라운 워십>을 들으며 찬송가와 오래된 복음성가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새삼 경험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힐난했던 ‘찬양’의 문제점은 곡 자체의 문제보다는 태도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인가? 또 다음엔 어떤 CCM을 들어 볼 것인가? 두 가지 숙제를 안고 글을 정리한다.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는 복음성가, 가스펠, 찬송가, CCM, 교회음악, 예배음악, 워십, 힘(HYMN) 등 다양한 이름(장르)로 불리고, 그 사이에 명확한 차이들도 존재하지만 이 글에선 혼용하여 쓰고 있다. 최소한 필자의 개인사에서 있어서 다양한 기독교 음악들은 혼용되어왔다는 점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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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사랑과 평화의 에너지가 가득한 CCM 목록 대공개 
 
말미에 언급한 두 가지 중 한 가지 숙제를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듣고 싶고 궁금해서 알아봤습니다. 고난받는 이들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는 크리스챤 음악인들에게서 얻은 소중한 음악목록입니다.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가객 <예수님 내가>
강명식 <흠 없는 경건> <경건>
김승신 <오래친구와 함께>
김이슬기 <완전하게 보리라>
드림선교단 <사슴벌레> <세상에게>
송정미 <서울역>
얼터 <지상최악의 밴드>
엔틸드 <길위에 임하소서> <냄새>
이길승 <철수엄마>
이대귀 <나는 진정 치유를 바란다>
이무하 <끊어진 길>
이성균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보물쌓기>
이정기 <청년외침> <어깨동무> 
이지음 <사랑이 이기네>
장현호 <길> <진리가 너희를>
조율 <그 힘을 어디에 쓰랴>
조준모 <더불어 함께> 
천민찬밴드 <한밤중> <네이팜데이지> <보스니아>
코드셋(CODE_3) <바람에 나는 겨> <내게  강같은 평화> <뉴타운>
쿨대디 <Hey Man>
큰바위얼굴 <공주님>
하늘소년  <땅따먹기> <넌 묻지 않았어>
홍순관 <낯선 땅 여기는 내 고향> <대지의 눈물> <담쟁이> <쌀한톨의 무게> <힘내라 맑은 물>
황푸하 <해돋이> <쿰바야>
 [웹진 평:상 1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경남 밀양의 세종병원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37명이 목숨을 잃고 151명이 다치는 참사가 또 일어났습니다. 유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다친 이들을 치유해 주십시오.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참사가 계속되며 서민들의 가슴에 상처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부디 이 나라와 백성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고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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