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02.24 13:50

2018년 2월 25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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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사순절 제2주일, 졸업입학 축하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며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기를 경건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일은 여성주일로 지킵니다.
2. 올해 졸업 및 입학하는 교우 자녀들은 한예원(대졸), 한예나(고졸 대입), 김동환(고졸), 김형준(중졸), 방정혁(중졸)입니다. 축하합니다.
3. 다음주일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4. 사순절 기간에는 주보에 매일묵상을 싣지 않고 '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에서 제작한 '2018 성서정과에 따른 사순절 묵상집'으로 대신합니다. 비치된 묵상집을 한 권씩 가져가셔서 사순절기를 경건하게 기도하며 지내십시오.
5. 지난 22일(목) 오후, 송윤혁 집사님, 박사라 전도사님 가정에 새생명이 탄생하였습니다. 큰 딸과 작은 아들 쌍둥이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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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여행 2018
“한국과는 다른 생활을 즐기는게 행복했습니다”  | 방정혁 학생
이번 대만여행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교회에서 불교 유적지를 간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신기한 일이라 생각하였고 제가 절에서 스님의 강의를 들을 때 까지도 였습니다. 스님께 강의를 듣고 명상의 시간을 가질 때 저는 종교에 대해 생각하였고 별다른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뜻깊은 활동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호텔 생활도 즐거웠으며 돈도 왕창쓰는게 즐거웠습니다. 한국에만 있다가 한국과는 다른 생활을 즐기는 것에 행복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시간이 맞지 않아 모이기 힘든 우리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머릿속에 크게 남았던 기억은 대만 야시장에서 어떤 종교단체가 TV를 틀어놓고 사람들을 현혹하는게 인상깊었습니다. 종교가 무섭게 다가왔던 기억입니다. 
또 잡소리하자면 어떤 섬으로 갔을때 사람들이 구걸하던게 생각납니다. 그분들도 노력한다면 다시 회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체 왜그러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어쨌든 대만에서 정말 즐거웠고 다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좋은여행 2018' 대만여행에 참가한 교우들의 여행기는 이번 주를 끝으로 마치겠습니다. 
글을 써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매년 2월 27일    "국제 북극곰의 날"
국제 북극곰의 날(International Polar Bear Day)은 매년 2월 27일로 북극곰의 보전 상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제정되어 다양한 캠페인을 개최하고 있다. 이 날은 북극곰 개체수에 큰 영향을 주는 지구 온난화와 빙하 감소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국제북극곰협회(Polar Bears International)에서 주창하고 행사를 주최한다. 이날 하루는 난방 온도를 낮추거나 자동차 운행을 적게 하는 등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할 것을 권장하며 주택 에너지의 효율성을 높이는 단열재 설치와 사용 등을 장려한다. 또한 많은 동물원이 북극곰 보호와 보전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고 북극곰을 보러 올 것을 독려하며 이 날을 홍보하고 있다. 이런 모든 노력들은 반드시 정치적인 호응이 필요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기후환경 캠페인 매니저인 잭 샤피로 (Jack Shapiro)는 이날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의회의 조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서스캐처원 대학은 국제 북극곰의 날을 기리기 위해 겨울에는 실내 온도를 섭씨 2도 낮추고 여름에는 2도 높여 조절할 것이라고 2014년에 발표했다. 이 결정은 대학의 탄소 배출량을 2천 톤 줄이고 연간 20만 달러를 절약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한다. 기후 온난화의 문제는 단지 북극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위기이다. |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사순절의 기도 | 이해인
 
사랑하는 것은 죽는 것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
당신을 위해서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것
주여 언제나 자기를 방어하고
사소한 일에도 누구에게나 지려고 하지 않는
승자의 오만 위에 곤두서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나에게
죽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여 나에게는 당신의 굳셈보다는 약함이
무한한 약함이 필요합니다
저주를 당해도 비난치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항거치 않고
죽임을 당해도 원망치 않는
사랑에 찬 약함이
이웃에게 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늘 머리를 쳐드는 나의 오만을
당신의 약함으로 부끄럽게 해 주십시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감리교는 무엇을 믿는가?
이찬석 지음 KMC (2014)
 
제3장 
하나님Ⅱ (3)
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며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아버지 하나님 |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은 하나님은 성(性)을 초월하신 분인데 아버지는 남성으로서 성(性)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유한성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고,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초월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은유(metaphor)로 읽어 가야 한다. 은유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친숙한 것들을 통하여 표현하고 이해하여 보려는 시도이다. 하나님은 절대자이고, 초월자이므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하나님은 낯선 분이라 할 수 있다. 이인간은 하나님을 완전하게 경험할 수 없고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으므로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는 하나님은 엄격하게 하나님의 일부분이지 하나님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절대적/초월적 존재인 거룩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익숙하지 않은 신비로우신 분이다. 그러나 인간은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경험하고 파악하고 있으므로 신비로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모든 인간들에게 아주 익숙한 개념이고, 하나님의 일부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우리들의 육신의 아버지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이해하여 보려고 시도하였다. 아버지 이외에도 ‘주’, ‘왕’ 등 다양한 은유들을 통하여 신비로운 하나님을 고백하고 표현하였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표현에는 가부장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있으므로 가부장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어머니 하나님’도 고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생태학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억압당하고 있는 자연과 여성의 근원적인 문제는 동일하다고 보는 생태여성주의자(Eco-feminist)들은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필요성을 더 강력하게 주장한다.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와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가능하고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버지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므로 ‘아버지’를 우상화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남성성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신적인 속성으로 우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아버지’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읽어 가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고백은 하나님을 인격적이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personality)이라는 말은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과 비교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은 관계성이 배제된 말이라면, ‘인격’은 관계성이 전제된 개념이다. 한 사람의 인격은 다른 사람들의 삶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드러난다. 인도에서 홀로 사랑가는 사람은 관계성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인격, 즉 사람의 됨됨이는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성을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에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인격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은 관계성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자녀가 없다면 아버지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아버지’라는 말은 자녀와의 관계성을 전제하고 있는 인격적인 개념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과의 관계성 속에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감리교는 하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참다운 하나님은 한 분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고백은 삼위일체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감리회 신앙고백 1조는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음으로 한 분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또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임을 고백하고 있음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삼위일체론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감리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하나님은 인간과 우주만물과 관계성을 가지시고 소통하시는 인격적이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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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묵상 - 이관택 목사
“'당신의 숲'은 어디에 있을까”
 
숲 속에서(All the Time In The World) | 수잰 크로커 감독 작품 | 89분, 캐나다, 2014년, 
 
영화 <숲 속에서>는 한 가족이 전기도, 수도도, 심지어 시계도 없는 야생의 숲에 들어가서 지냈던 9개월간의 시간이 담겨있는 다큐멘터리다. 지난 2016년 ‘EIDF(EBS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발)’에 초청되었던 캐나다 작품으로, 캐나다의 청초하고 광활한 자연 속에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열일’하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인적 없는 숲 속에 자리를 잡고 가을부터 그 다음해 봄까지 살아간다. 직접 통나무집을 짓고, 곰과 독수리 등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야생 버라이어티’한 여정을 몸소 살아내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한 사람의 내래이션이나, 특정인물의 시점으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 결을 달리한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두 부부와 4살 6살 10살의 삼남매, 개 한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의 모습을 포착하고, 그 영상 밑으로 마치 수다를 떨듯 다섯 가족의 인터뷰가 쉴 새 없이 흐른다. 
 각 자의 행동을 설명하고, 그 상황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고, 보는 이들과 함께 삶의 의미를 공유하고자 끊임없이 흐르는 20180225_003.jpg

 

이들의 수다는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정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숲의 풍경은 부산스러운 수다를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살아나며, 자칫 공포스러울 수 있는 혹한의 겨울 숲은 4살, 6살, 10살 어린이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통해 신나는 모험놀이의 장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들과 반려동물들이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그리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남매의 어머니가 바로 감독인 수잰 크로커였다. 이 영화, 아니 이 가족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다. 도대체 이들은 왜 힘겨운 야생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으며, 왜 이런 다큐멘터리를 직접 만들게 된 것일까.  
 
 이 다큐멘터리의 원제는 <All the Time In The World>이다. 직역하면 ‘세상의 모든 시간’ 정도가 될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이 가족이 숲에 들어가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제시하는데, 매우 빠른 속도로 편집된 영상과 신경 쓰일 정도로 크게 울려 퍼지는 시계의 초침소리는 그 동안 이들이 현대사회 속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역으로 그 거대한 초침소리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숲 속의 삶을 선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볼 수 있겠다. 이들 가족은 시계의 초침소리 대신 숲의 새소리와 시냇물 소리를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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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온갖 ‘시계’ 속에 둘러싸여진 세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시계에 둘러싸인 삶일수록 ‘시간’은 부재하다. 시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온갖 사회적 약속과 책무에 얽혀있다는 것의 반증이요 이에 떠밀려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시간은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숲 속에서는 어떨까. 도시문명에서 누리지 못했던 시간의 여유를 풍족하게 누릴 수 있을까. 겨우내 바쁘게 움직이며 ‘열일’하는 이 가족의 모습을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숲 속에서의 삶은 물리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어서 오히려 별 것 아니라 생각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한다. 예를 들면 세면을 하려면 물을 구하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직접 강가에 가서 물을 길어야하고, 밥을 하려면 불을 지피기 위해 땔감을 만들어야 한다. 또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려면(직접 아이스크림을 만들며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반나절이 족히 걸리니, 초침소리 요란한 도시나 자연의 숨소리가 가득한 숲이나 시간이 없긴 매한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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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간이 ‘물리적인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All The Time’은 우리말 ‘항상’으로 직역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본인이 누리는 ‘주관적인 시간’을 말한다. 초침소리에 쫓겨 다니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계획해서 살아가는 ‘나만의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숲의 시간은 오롯이 나의 시간이며 내 가족의 시간이 된다. 
 여기서 ‘시간’을 ‘하나님’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시간을 인식하도록 표시하는 ‘시계’로 둘러싸인 삶 속에 정작 나의 ‘시간’이 없듯,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교회’로 둘러싸인 삶 속에 진정 ‘나의 하나님’이 부재할 수도 있다. ‘All The Time’은 오롯이 내가 만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규칙을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아무리 바쁘게 종교생활을 뺑뺑이 돌리듯 강요해도 결국 하나님과의 조우는 우리 스스로가 ‘숲’으로 들어가 만날 일이다. 시계는 다만 시간을 표시하는 기계에 불과하고, 교회는 다만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모인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신의 숲’으로 들어갈 것을 권한다. 그 숲에서는 하나님 뿐 아니라, 당신의 삶과 당신의 가족, 그리고 불안하고, 힘겨운 삶의 변곡점들을 헤쳐 나갈 용기와 지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자칫 지나치기 쉬우나,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숲에서 지내는 ‘시기’에 있다. 가을에서 봄까지. 마치 유대인들이 하루의 시작을 아침이 아닌 저녁시간으로 인식하며 캄캄한 밤을 하루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생각하듯이, 이 가족은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겨울을 숲에서의 가장 중요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다.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안락함과 편안함을 찾기 위해 숲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시간. 겨울 지나 맞이하는 봄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만나기 위한 시간인 것이다.
    
 어디에 있을까? 시계 초침소리에 쫓겨 허덕이고 있는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숲의 공간은.
 
※ 함께 읽으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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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에 등장하는 이효리의 ‘제주살이’가 매력적이었는지 얼마 전,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필자의 친구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떠날 것을 선언했다. 톱니바퀴 같은 도시생활에 그만큼 진저리가 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벌어 두었던 돈을 싸들고 풍광 좋은 곳에 머물며 편안한 쉼과 소비에 몰두한다고 해서 과연 인생이 좀 더 자유로워 질 것인가? 불행하게도 물질만능과 경쟁의식에 매몰된 삶의 방식에 계속 머물러 있는 한, 몸이 어디에 있던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방도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다. 머물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는 것! 바로 이러한 진퇴양난의 현실이 맘몬의 세상 속에서 발버둥치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허나 다행스럽게도 마냥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겠으나 <숲 속에서>의 가족처럼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진정성 있는 삶과 행복을 추구했던 선례들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들을 책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부디 아래 두 권의 책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경험하며 우리들의 삶과 신앙이 더욱 풍성하게 되길 소망한다.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대표적 수필집이다. 그는 1845년에서 1847년까지 물욕·인습의 사회와 인연을 끊고, 월든의 숲속에서 살면서 홀로 철저하고 청순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며 자연과 인생을 직시했다. 이 책은 그 생활기록으로서 20180225_005.jpg

 

그의 인간과 사상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문체 또한 절묘하여 미국 수필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애독되며 특히 톨스토이와 간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최초 발행: 1854년 (출처: 위키백과)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
 / 스콧 니어링 & 헬렌 니어링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은, 미국이 일차 대전을 치르고 대공황의 늪으로 빠져들면서 모두의 안전을 위협하는 1930년대 뉴욕을 떠나 버몬트의 작은 시골로 들어간다. 두 사람은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원칙을 세운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적어도 절반 넘게 자급 자족한다. 스스로 땀 흘려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양식을 장만한다. 등이다. <조화로운 삶>은 두 사람이 버몬트에서 지낸 스무 해를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최초발행: 1954년 (출처: DAUM 책)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노동권 보장과 고용 안정을 위해 지난 2014년부터 408일간 고공농성을 벌이다 사측과합의하여 농성을 풀었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다시 서울에너지공사의 75미터 굴뚝에 올라 농성 중인 파인텍 박준호, 홍기탁 노동자를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 영하 20도의 겨울을 벼텨낸, 이들의 목숨 건 투쟁이 곧 승리하도록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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