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9일 강림절 제4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기쁨의 이유'
이관택
본문: 빌립보서 4 : 10~14
10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11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여러분이 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잘 한 일입니다.
제가 3월에 담임 전도사에 취임하고 나서 처음으로 한 설교의 제목이 "만남 그 길들여짐의 여정"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했던 말 중에 여러분들을 만나는 것이 매우 두렵고 떨리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각자가 삶의 자리와 삶의 지향점은 다르지만, 이렇게 좋은만남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만나서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서로 그 동안 많이 길들여졌습니까? 함께 사는 여행같은 인생인데, 그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 옆 사람이 이제 좀 대하기가 편하십니까? 저는 지난 한 해 동안에 여러분들과의 만남과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릅니다.
강경숙 집사님과 공동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오신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용기주시고, 위로 하시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상황을 들어서 역사하시고, 또 어떤 때는 사람을 들어서 인도하시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이 분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이 나를 들어서 강경숙 집사님과 어떤 만남을 계획하고 계실까? 나는 어떤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나? 이런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결국 '만남'이라는 것 특히나 '좋은 만남'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있습니다. 먼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장을 보면 신앙인은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즉 나 자신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편지를 쓸 때, 주안점을 두는 것은 받는 사람이 이 편지를 어떻게 볼까? 받는 사람이 편지를 보고 어떤 감동을 받을까이지요? 하여간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해주신 말씀, 또 본인의 아픔을 솔직하게 나눠주신 그 용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썼다고 알려진 이 짧은 편지는 흔히 기쁨의 서신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4장 4절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이 구절을 비롯하여 빌립보서는 매 장에 기뻐하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챤의 삶이 얼마나 기쁨에 넘쳐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삶을 돌아보면 기쁜 일이 많이 있습니까? 지난 주 묵상기도회 때 올 한해를 돌아보면서 행복했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아무래도 기쁜일보다는 힘들었던 일이 더 많않던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또 이 암울한 시대를 볼 때 가히 기뻐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지난 주간에 작년 쌍용차 사태 이후에 해직된 노동자 한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작년부터 올해까지 1년간 쌍용 자동차 사태로 해직된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중 죽음에 이른 사람이 벌써 11명째라고 합니다. 또 이 추운 겨울날 지하철 한 켠에서 생활 하시는 노숙인 분들을 보면서 과연 마냥 기뻐 할 수 있을까요? 제 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가식적인 미소가 정말 너무 오그라들고, 또 싫다고 합니다. 왜 항상 웃으라고 이야기 합니까? 왜 항상 기뻐야한다고 얘기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기쁨은 슬픔을 차단하고, 마냥 해맑은 웃음을 짓는 것도, 가식적으로 미소를 얼굴에 가득 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는 쓴 사람도, 받는 사람도 가히 기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그는 온 몸에 가시같은 병을 지니고 있고, 언제 사형을 당할지 고문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조건에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상업이 발달한 빌립보라는 곳에서 기독교를 믿는 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변사람들이 떠나가고,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합니다. 또 로마 정부의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방인 크리스챤이라고 같은 기독교인인 유대인 크리스챤에게 조차 멸시를 당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바울이 감옥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이야기하는 기쁨은 단지 감정적인 '기분 좋음'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바로 희망입니다. 바울은 힘든 상황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너희는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저 하늘 위를 반짝거리는 '스타'될 것이다. 또 어떤 조건이든 나에게 능력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내가 그 존재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아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힘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 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악하다!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세상 사람들이 말할 때 그 시대의 논리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 절대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바로 참 기쁨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기쁨은 함께해야 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심지어 감옥에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혼자 독식하는 것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을 혼자 가졌다는 우월감일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가 주는 대부분의 기쁨은 거짓된 것이 많습니다. 오히려 내가 기쁠 때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기쁨은 함께 공유해야지만 참 기쁨이 됩니다. 함께 나눠야 진짜 기쁨입니다.
‘다함께 봄’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디 꽃한송이 핀다고 봄인가요? 함께 피어야 봄이지~
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뻐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기뻐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모든 것을 잃은 자 같으나, 실상 모든 것을 얻은 자.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우는 사람 그리하여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