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1일 성령강림절 제7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신앙의 키포인트
이관택
본문: 마태복음 22:34-40
34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35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36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불행은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운다.
지난 한 주간 아무 탈 없이 살아남아 주셔서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하늘에서 내린 물폭탄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집을 잃고, 참변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뉴스를 통해 서울의 가장 부자 동네인 강남일대가 모조리 물에 잠긴 모습을 보았고, 우면산이 마치 쓰나미처럼 쓸려 내려와 수많은 자동차와 주택가를 덮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안에는 ‘무력감’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이 얼마나 무력한가! 그 잘났다고 얘기하는 우리의 모습이 단 반나절만에 너무나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불행은 잠들어 있는 우리 자신을 흔들어 깨웁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나의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마치 잠들어 버린 것 같은 우리들의 삶을 블행이란 녀석이 억지로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는 불행은 우리로 하여금 잠자고 있었던 세포들을 살아나게 합니다. 하지만 이 느낌은 마치 나를 향해 끊임없이 일어나라고, 너무 늦었다고 외치는 하나님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하나님께서 그 측은한 눈빛으로 우리를 향해 경고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모습으로 다가와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수해를 통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시금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의 보여주기식 서울시와 이명박 정부의 시정행태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살아남은 이들은 죽어간 이들의 목숨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일이 또 다시 생기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가고, 또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남은 이들의 몫입니다.
더불어 신앙인인 우리들은 다시금 무력하게 잠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혼자 너무 외로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좀 더 깨어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저냥 살고, 좋은게 좋다고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깨어있는 삶을 살수 있는가?에 대한 신앙적인 고민을 하나님께 던져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한 번 이 시간에 하나님께 여러분의 고민들 던져 보시죠? 어떻게 하면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핵심을 짚고 있는가?
여러분 학교 다니면서 경험해 보셨겠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잘 못하는 학생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바로 ‘핵심’을 잘 찾느냐 못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 동생이 공부를 굉장히 잘했었습니다. 외고를 수석으로 들어갈 정도였으니까요. 저랑 연년생이다 보니까 비교가 많이 되었는데요. 저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시험을 본다고 하면 최소 2주전부터 공부를 시작합니다. 또 열흘 전부터는 머리를 감지 않습니다. 시험 모드로 들어가는 거죠. 더럽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제 동생은 시험 보기 몇일 전까지도 그냥 평상시 하는 대로 합니다. 공부를 별로 안하죠. 그보다는 별로 공부하는 티를 안낸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녹즙 갈아달라고 하고, 독서실 가야 한다고 하고 부산스러운데, 그 녀석은 평소랑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시험은 전교 2등하고~
나중에 그 녀석의 노트를 보니 알겠더군요. 자난달 노트에는 진짜 지난 번 시험에 나왔던 내용들이 빼곡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제 동생은 시험의 키포인트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저는 머리도 안 감고 소란은 있는 대로 떨었지만 결국 키포인트를 몰랐던 것입니다.
공부에만 키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도 키포인트가 있지요. 또 우리가 믿는 신앙에도 키포인트가 있습니다. 수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 또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키포인트입니다. 신앙생활을 수십년씩 하고도 이 키포인트를 알지 못해 흔들리고,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타락하고, 실패해버리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개독교라 불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이유는 원래 기독교의 교리가 반사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신앙인들이 키포인트는 모르고, 곁가지에만 집중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신앙의 키포인트를 파악하고 그대로 살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악한 질문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과 거의 비슷한 본문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을 정화하시고, 비유를 몇 가지 드시고, 그 다음 장면이 바로 기존의 종교권력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입니다. 실은 대결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 그리고 율법학자 또는 서기관이라 불리는 이 종교권력자들이 일방적으로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바로 앞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과 부활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지혜에 말문이 막혀 버리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에 34절에 나온 것처럼 바리새인들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인기있는 사람들, 영향력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서로 견제하고 싸우기 바쁜 이들입니다. 결코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공동의 적이 나타났잖아요. 예수란 사람이 만만치가 않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예수를 시험할 수 있는 묘책을 짜내지요. 그것이 바로 36절의 질문입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정말 가증스럽게 물어봅니다. 이 질문은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화두였습니다. 왜냐면 당시 랍비들은 율법을 총 613개 조항으로 구분하였고, 이 중 248개 조항은 더 중요한 것으로, 나머지 365개 조항은 조금 덜 중요한 것으로 나누어 지켰습니다. 하지만 항상 논란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율법이냐? 이 문제는 비단 율법학자들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신앙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문제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것 까지 삶의 모든 것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문제였고,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질문의 대답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분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이 질문의 대답을 회피합니다. 논쟁에 중심으로 휘말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란 작자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보자!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아주 사악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키포인트 1 - 사랑에 빠진 것 같이 사는 것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예수님께서는 위의 짧은 대답 속에 신앙의 키포인트를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온 율법과 예언서는 성서 자체를 말합니다. 즉 성서의 키포인트는 바로 하나님 사랑 과 이웃 사랑 그리고 ‘네 몸과 같이’ 즉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39권 나아가 전체성서 66권이 이 세 가지 사랑!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요. 모든 존재를 그물망처럼 엮여있는 관계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위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배하고, 밥먹고, 인사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고마워하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사랑하는 존재! 그리고 모두 다 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이다. 거기다 자기 자신도 무척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밥은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사랑에 빠진 것 같이~’ 싸움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에 빠진 것 같이!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겁니까? 얘들 공부하라고 야단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이 613개 조항으로 분류되어 골치를 썩게 했다면 오늘 현대의 무수한 지식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무엇이 옳은거지? 중요한 것은 사랑에 빠진 것 같이 살아가야겠지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사는 것이 신앙의 첫 번째 키포인트입니다.
신앙의 키포인트 2 - 나의 행복에만 집중하지 않기
신앙의 키포인트 두 번째는 나의 행복에만 집중하지 않기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피면 너무 ‘나’자신에게만 집중하여 균형을 깨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나에 대한 사랑이 연결되어 있는 데 그것을 너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입니다. 이 ‘행복’에 대한 맹신이 가히 병적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사실 행복과 ‘만족’은 구분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족’을 ‘행복’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놀라운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미국의 베트남 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를 분석해보니, 이 세대는 개인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기 시작한 세대인데, 자살률이 그 이전보다 10배가 높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행복’에만 집중하고 추구한다고 해서 그 개인이 행복해 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행복 추구의 욕구가 강합니다. 신앙이고, 의미고 그저 내가 행복한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상속에서 진정으로 나를 위한 일은 결국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일과 더욱 상관이 있습니다. 나의 이웃을 위해, 이웃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결국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인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덕분에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그 살인이 ‘예배’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면 참으로 섬뜩한데, 그 속내를 보면 하나님에게까지 거부당한 것 같아 실의에 빠진 가인에게 아벨이 따뜻하게 대해주고, 사랑해주고, 하나님은 그런분이 아니야. 형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잖아라고 말해 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께 먼저 집중하는 것이 신앙의 키포인트입니다. 또한 힘겨워하는 이웃의 삶에 관심 갇는 것이 당연히 나를 사랑하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어제 희망버스가 출발했습니다. 이 시대의 희망을 위해 기도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이들은 희망을 만들기 위해 먼 곳까지 직접 몸을 움직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대한이와 인건이가 희망버스를 탔는데요. 가고 안가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지 우리가 다시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키포인트 3 -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마지막 신앙의 키포인트 세 번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돈이 돈을 버는 것 즉 자본이 자본을 버는 시대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것, 여러분의 직장, 주택 등등이 과연 여러분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미국의 존롤스 조차 인간은 임의적인 집합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난 결과물들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성과가 아니라고 합니다. 환경과 여건, 그리고 성품, 심지어 ‘노력’조차도 임의적으로 주어지는 경우이기 때문에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은 어렵지만 결국 이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떵떵거리며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남보다 좀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이 내가 남보다 더 잘난 것이 아니라, 좀 더 운이 좋은 것 뿐이죠. 좀 더 좋은 가정에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절대 자랑하거나, 지금 내가 모은 재산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난 성격이 좋아 난 너무 이뻐! 내가 젤일 잘나가!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찾기
여러분이 연애 할 때 주로 어떻게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서로 마주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님 서로 같은 방향을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서로 같은 방향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더 큰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몰랐던 부분을 깨닫고, 또 꿈꾸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꿈꾸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이웃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 안의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사랑은 연결되어 잇습니다.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흔적 찾기입니다. 우리 삶의 가득한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자, 믿음의 길입니다.
맨 처음에 공부할 때의 나와 내 동생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항상 소소하게 일상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핵심을 찾아내던 내동생, 뭔가 소란스럽고 분주하고, 다짐하고, 그러면서도 핵심을 잘 찾지 못했던 내모습.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핵심을 찾고, 하나님의 흔적을 찾길 원하실 것입니다.
삼류가 될지언정 아류는 안된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해코지하기 위해 찾아간 바리새인의 질문에 예수님은 ‘사랑론’을 나열합니다. 질문했던 그 바리새인의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을까요? 결국 내 앞의 있는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어찌 하나님의 일을 말할 수 있겠나? 아마 바리새인이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내였을 것입니다.
1류, 2류가 못되고 3류, 4류가 되어도 좋다. 누군가의 아류만 되지 말아다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각자의 신앙은 각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잘 못하고 어설픈 삼류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신앙의 키포인트를 고심하시면서 하나님께 물어보시기도 하면서 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겉모양만 기독교인입네하는 아류가 되지 않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