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7일 성령강림절 제8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하나님의 흔적 찾기
이관택
본문: 시편 10:1-6
1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2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인은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해주십시오. 3 악한 자는 자기 야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 4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늘 이러합니다. 5 그런데도 악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잘 되고, 주님의 심판은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악인은 오히려 그의 대적을 보고 코웃음만 칩니다. 6 그는 마음 속으로, "내가 망하는가, 두고 봐라. 나에게는 언제라도 불행과 저주란 없다" 하고 말합니다.
http://tvnews.media.daum.net/view.html?cateid=100000&newsid=20110806211546730&p=sbsi
용역깡패의 전갈 문신이 기억난다.
경제개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중국은 지금 개발로 인해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들의 뺏고 뺏기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우리나라는 경제개발이 시작된 지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약 40년간 단 하루도 그치지 않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도 또 짓고 있더라구요.
다음 사진은 포이동 266번 재건마을이라는 곳의 사진입니다. 타워팰리스와 판자촌은 양극화라는 우리사회의 참 아이러니한 면을 보여줍니다. 이 사진을 보면 실상 빈곤은 개발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층건물이 서있는 곳 옆에는 반드시 슬럼가가 형성된다는 것은 거의 공식과 같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는 이 곳을 밤새 지키고 있었습니다. 6월 중순에 이 판자촌 마을에 불이 났는데, 화재당시 소방차도 한 시간 가까이 늦게 도착하고, 심지어 물도 채워 오지 않아 마을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도 강남구청은 두 달 동안 그 곳의 화재잔재를 치워주지도, 새로운 건축물을 세워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을주민들이 겨우겨우 집을 임시로 건축했는데, 그것을 철거하러 용역깡패들을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룻밤을 꼬박새며 새벽에 처들어온다던 용역깡패를 기다리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아파트를 짓고, 새로운 건축을 지을때, 그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것이 바로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쫒겨나는 과정입니다. 집이 있고, 땅이 있는 사람이야 보상을 받는다지만, 세들어 사는 세입자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 피해를 보면서 쫒겨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용산참사와 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를 동반하는지 경험하였습니다. 특히 못나가겠다고 버티고 있는 사람을 쫒아내는 방법이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데, 용역깡패를 동원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내모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내가 힘이 없을 때, 무력할 때, 또 진행되는 상황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과연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요즘 제가 페이북이라는 소셜네트워크를 즐겨합니다. 엊그제 누군가 지금 소말리아에서 한달에 1만명이 죽어가고 있다고 올렸더라구요. 계산해 보니 하루에 333명 꼴입니다. 1시간에는 14명꼴입니다. 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냐면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당 14명의 아이가 굶어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 어린아이들에게 너무나 억울한 사건입니다. 또 그 가족에게도 너무 가혹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문득 의문이 들긴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있긴 한거야?
예전 2차세계대전 때 600만명의 유태인들이 히틀러에 의해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데, 왜 이분은 숨어 계실까? 왜 내가 가장 힘겹고, 억울할 때, 도대체 어디있는가?
앞의 예들은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정작 우리 자신도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건에서 그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제 경우에는 말하기도 조금 민망한데,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은 어디있나요?라고 질문했던 사건은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이기에 하나님에 대해 당연히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때 어떤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되었지요. 그 친구와 잘되길 내심 기대하면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제 인생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새벽기도도 꼬박꼬박 나가고, 목욕탕에서도 잠수해서 숨을 참아가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100일 가까이 정성스럽게 말이죠.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회의감을 갖게 된 시기였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흔적 찾기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시편 10편에서 다윗은 지금 매우 극심한 환란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2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자신이 그토록 찾던 하나님이 마치 곁에 안 계신 것 같은 상황, 아니 오히려 나를 놀리듯이 숨어있는 것 같은 상황에 다윗은 직면해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다윗도 수시로 이런 상황에 내몰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아니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 앞에 언제나 우리는 무력해지고, 그 때 마다 숨어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무력함 가운데 우리는 더욱 하나님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서를 보면 구약성경에 욥이 그랬지요.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내게 고통을 주시냐고 따지다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 아닙니까?
신앙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흔적 찾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은 결국 그 모습을 우리 앞에 가시적으로 보여주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겨우 하나님의 흔적을 쫒을 뿐입니다. 모세도 겨우 하나님의 등만 쳐다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디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흔적을 어떻게 찾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성서의 문자 너머에 계신다.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으면서 유일한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입니다. 이 성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사건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성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성질, 그리고, 계획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가까이 함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무작정 읽는다고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여리고와 아이성을 함락하면서 모든 생명을 남김없이 더군다나 갓난아이까지 죽이라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까?
매켄타이져라는 사람이 인간은 “서사적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스토리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죠. 하나님에게도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서의 문자 너머에 계십니다. 문자에 집착하다보면 종채 종잡을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너무나 무섭고, 완고한 하나님.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줄 알았는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는 고집쟁이에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진짜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지 않으면 지옥가니까요? 우리를 협박하고, 윽박지르니까요? 흔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앙의 키포인트가 뭐냐고 묻는다면 예수께서 얘기한 것같이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적인 것이며, 궁극에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읽을 때, 문자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땅의 생명을 모두다 죽여야 한다고 명령한 것으로 신앙을 고백했을까 고민해봐야 합니다. 왜 아브라함은 야곱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을까? 실제 성서는 인간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묘’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흔적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존재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김영민이라는 철학자는 세상을 볼 때 ‘묘의 지극함’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묘는 원가 ‘오묘하다’고 할 때 쓰이는 ‘묘’입니다. 모든 세상은 묘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묘의 지극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필이 있습니다. 단순한 물체이지만 이것은 나무와 흑연의 결합으로 이루어 집니다. 나무는 오랜 세월 빛과 탄소 물의 탄소 동화작용에 의해 생명을 이어왔습니다. 그 나무가 많은 단계를 거쳐 우리 앞에 연필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필은 태양이기도 하고, 탄소이기도 하고, 물이기도 합니다. 연필은 결국 온 우주가 함께 만들어낸 마술쇼와 같습니다. 이 간단한 연필 한 자루만 놓고봐도 묘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가만보면 우리 주면에 묘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물건이 그러한데, 생명을 그 묘함이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데 중요한 것은 이 묘한 모든 것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정확히 발견하긴 어렵지만 이 묘하다고 감탄할 수 있는 곳곳에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안에서 움직이시는 바람 같은 하나님
다른 사람, 다른 물체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체험하게 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피리나 풀롯 종류의 악기는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스스로 소리가 납니까. 누군가가 불어야 소리가 나죠. 중요한 것은 부는 행위가 아니라, 부는 것은 피리안에 바람을 집어넣는 행위입니다. 결국 바람이 그 피리의 소리를 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온 바람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히브리어로는 루아흐, 헬라어로는 푸뉴마라고 합니다. 둘 다 바람같다는 뜻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냄새가 나지도 않지만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람이지요.
우리 삶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삶의 순간순간 느껴지는 섭리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뜨거운 감동으로 찾아오기도 하구요, 어떨 때는 반쩍이는 깨달음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또 어떨때는 작고 소소한 기쁨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을 내가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나를 찾아와 나를 움직이는 바람과 같은 경험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바람과 같은 에너지로 인해 움직이는 내 삶의 단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흔적
누가복음 17:20-21 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냐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명동에 마리라는 곳을 중심으로 철거민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데, 지난 주에 용역 깡패 100여명이 그곳을 쳐들어갔습니다. 박용환 성도님께서 그 날 그 자리에 있다가 깡패들에게 맞고 병원에 실려가시기도 했는데요. 그러한 과정을 통해 다시금 용역깡패들이 물러가고, 철거민들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 힘든 과정 중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라고 고백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흔적은 서로의 얼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리고 내얼굴을 통해 옆사람에게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어디갔냐고? 질문하는 다윗이라고 하나님을 정확히 대면했을 까요? 결국 우리모두는 하나님의 흔적을 쫒을 뿐입니다. 그 흔적들의 집합체가 바로 우리가 인식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정확히 만났다고 하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신앙을 막 강요하는 사람은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삶 가운데, 꾸준히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내고, 하나님의 모습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을 믿기 쉬울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쉬울까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요즘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기가 더욱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내 옆 사람과의 관계, 이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믿음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흔적은 우리 삶의 곳곳에 가득하다. 우리 함께 하나님의 흔적을 찾고, 더욱 아름답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함께 해나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