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난과 영광의 갈림길에서
성서 : 마태복음 11:7-10
7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10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들어가며 :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 열정의 계절에도 여러분과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랜만에 이 자리에 올라 설교를 합니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추운 겨울보다는 여름이 더 낫다고 하지만 요즘 여름은 참 많이 힘듭니다. 여러분들 이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잠시 쉬어가는 계절이니 조금 느긋하게 쉬기도 하고 여유도 부리면서 넉넉하게 지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를 하나 시작하면서 오늘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한 젊은 사람이 쓴 글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우리 네 명은 매우 친하게 지내는 사총사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친하게 지내서 항상 함께 다녔죠. 그런데 넷이서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두 명의 친구가 죽었습니다. 두 명의 친구 장례식을 마치고 자주 가던 카페에 살아남은 친구들과 갔습니다. 그런데 웨이터는 우리 네 명이 또 같이 오는 줄 알고 물을 네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하던 친구 녀석이 그날 따라 죽은 친구들이 더 생각이 났는지 화를 내면서 빈 자리에 있는 물잔을 치우라고 웨이터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웨이터가 빈 자리에 있는 물잔과 내 앞의 물잔을 치우더군요...’ 납량특집이었습니다.
들어가서 : 일전에 제가 쓴 글이 당당뉴스에 올라간 적이 있었지요. 그 글은 평창이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도록 확정되었을 때 그 내용을 소재로 쓴 글입니다.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고 삼수 만에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으니 축하할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 문제도 많다. 결국 이런저런 공사로 토건 재벌들 일꺼리만 만들어주고 정작 강원도민들은 모든 이익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으니 잘 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제 글이 사람들 눈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 경사에 재 뿌리는 글처럼 보였나 봅니다. 인신공격을 포함한 비난글들이 댓글로 족족 달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것은 은혜이고 국가적으로 기뻐할 일인데 왜 딴지를 거느냔 말입니다. 심지어는 ‘이 사람은 뭔가 내면적 상처가 있는 사람인 것 같으니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 안 되겠다’는 글도 있었지요. 물론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일로 제가 참 의기소침하고 한동안 상처를 받아 마음이 아주 많이 불편했었습니다. 정말 내가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 사람인가, 정말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일들이 있는지, 왜 내가 이처럼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왜 기독교인들이 내 글을 못 견뎌하는지 곰곰히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에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이고 하나는 영광입니다. 신약성서도 가만히 보면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의 관점이 지속적으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갖은 고난과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 관점과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 결국 하늘 보좌로 오르셔서 영광을 누리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관점입니다.
고난에 관심하는 고난의 신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이 낮고 천한 땅이라는 곳에 오셔서 그 고통을 당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며 그 고난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이들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이들이며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서민들 혹은 서민보다도 한 층 낮다는 죄인 그룹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당시 권력을 가진 세력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하는 재야인사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고난에 관심하는 사람들은 지지리궁상 떨면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그들과 함께 하고 살기도 하고 또 물질이 생길 때마다 그들을 돕는 일에 나누다보니 그 자신의 삶도 그저 그렇게 지지리궁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권력자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 따지고 드니까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 영광에 관심하는 신학, 신앙은 고난도 결국 영광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지지리궁상 떨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원래 정체는 거룩하고 영명하신 유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대속의 과정이었을 뿐이지 고난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이 땅에서 누려야할 삶의 모습이라는 신념이자 신앙이 중심에 있습니다. 하늘문이 열리고 천군천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을 하는데 그 한 가운데는 금은보화로 장식한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빨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옷을 입고 계신데 그 머리에서는 광채가 환합니다. 이것이 이런 신앙을 가진 이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궁상떠는 삶보다는 유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써 살아가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 심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가난에 처하고 일이 풀리지 않고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갑니다. 아니면 믿음이 없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시기 위해 이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신자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삶은 부자로 넉넉하게 살면서 은혜롭고 아름다운 말만 하고 아름답고 친절한 표정으로 이웃을 대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 부와 권력으로 가난한 이웃을 적당히 도울 수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부와 권력에 대해 거부하고 저항하는 이들을 하나님에 대한 거부와 저항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의 근원이 되는 성서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세례요한은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임무를 밭았습니다. 헤롯왕의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힌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고 전하라 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묻는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광야에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는 것입니다. 광야에 부드럽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려고 왔느냐? 아니다.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으니 왕궁에 가야 볼 수 있다. 광야로 나온 것은 예언자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광야가 어디입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아직 천국에 이르지 않은 땅과 삶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간 우리가 만나고 직시해야 할 삶의 모습은 왕궁과 같은 화려한 삶이 아니라 예언자와 같은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언자는 낙타 가죽 옷을 입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광야 한 가운데 살고 있으며 왕에게 미움 받을 정도로 바른 소리를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화려하고 부드럽고 인기 있고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예언자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매우 중요한 것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신앙인들이 지지리 궁상맞게 살면 안 되지요. 잘 먹고 잘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야죠. 그러나 그런 영광스러운 삶의 단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신앙생활 잘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영광는 사실은 거기서 거기. 비슷한 이야기, 단계적 이야기입니다만 이상하게 한국교회에서는 특히 더 첨예하게 갈립니다. 한국 신앙인들이 매우 큰 착각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만약 예수님이 우리 앞에 서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보려고 이 자리에 나왔느냐’고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교회 나오고 예수님 믿으면 고난당하고 죽을 만큼 힘들다고 하는데도 예수님 믿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우리에게 오신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 말씀 아래를 보면 ‘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전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의 길은 그저 고난과 죽음의 길이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오면 마음에 쉼을 얻고 편한 멍에, 가벼운 짐을 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한 번도 보도 듣고 못한 신세계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신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나누니 행복하더라, 비우니 편안하더라, 함께 하니 넉넉하더라, 죽을 각오 했더니 영생을 얻은 것 같더라, 이웃과 함께 하니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더라...
나가며 : 평창 동계올림픽은 국가적 경사라고 난리이지만 벌써부터 심각한 환경파괴와 불필요한 건설공사 남발, 강원도 지자체의 재정악화를 예고하고 있으며 부동산 투기조짐도 일고 있습니다. 그 모든 재정적 부담은 별로 잘 살지도 못하는 강원도민들이 지게 되겠지요?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악마의 부추김과 시험인지는 잘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이 대회 유치를 놓고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도 참된 믿음의 관점에서 기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평창은 그렇다 치고!
고난은 세상의 언어로는 고난이지만 신앙의 언어로는 참된 행복입니다. 반면 세속의 언어로 영광이지만 신앙의 언어로는 물질주의입니다. 영광은 성공과 풍요를 전제로 합니다. 그 내용은 결국 물질주의, 성공주의입니다. 기독교신앙은 하나님 신앙과 우상숭배의 끝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바알, 아세라는 풍요, 다산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반영한 허상이고 거짓이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죠? 우리는 지금 고난과 영광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고난과 영광이라는 단어 자체는 우리에게 그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더 혼란스럽게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선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고난과 영광의 갈림길에 선 여러분!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무엇을 보려고 지금 이 자리에 섰느냐?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자 하느냐? 영광이냐, 고난이냐?’